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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천교육교사모임 Jan 26. 2021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사육제’

소설집<일인칭단수>중에서. 박미정 씀.

슈만은 사람들의 ‘가면과 민낯 양쪽을’(p.169) 보는 사람이고, 그 자신이 ‘가면과 민낯의 숨 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p.169)이다. 사육제는 가면을 쓴 사람들과 가면 뒤에 숨겨진 불길한 기운, 악령의 씨앗을 담은 음악이다. 슈만과 사육제를 깊이 이해하며, 좋아하는 그녀 F* 또한 가면을 쓰고 있다.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는 사이 얼굴에 들러붙어서 뗄 수 없어진 사람’(p.170)이다. 더 이상 가면이 가면이 아닌 게 되고, 가면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잊어버린 사람이다. 노인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추함이 그녀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화자는 가면 뒤에 숨겨진 그 사람의 민낯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추한’ 가면 뒤에 분명 ‘아름다움’ 이 있을 거라 믿는 사람이다. F*가 구속된 이후에도 <사육제> 공연에 갈 때면 그녀의 모습을 찾는다. 스무 살에 ‘예쁜 편은 아니’ 었던 소개팅녀가 ‘그냥 못생긴 애’(p.180)가 되지 않도록 다시 만났던 것처럼 F*에게도 그렇게 하고 싶은 걸까. 그녀를 추한 사기꾼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녀의 가면 뒤 어딘가에 있을 민낯을 들여다봐주기 위해서.


F*는 화자와의 대화에서 가면이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사람의 민낯을 볼 수 있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화자가 자신의 못생긴 얼굴 너머 어딘가에 있을 아름다움을 들여다 봐주기를 바랐던 걸까. 화자는 “그것을 볼 수 있었던 슈만은, 결국 행복해지지 못했다.”고 했고, 그녀는 “이렇게 환상적인 음악을 남겼다. 행복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다”라고 답한다. 이 대화를 보면서 결국 이것이 작가의 운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세계와 인간의 가면 뒤에 있는 민낯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보려 애쓴다. 화자는 F*와 자지 않은 이유로 그녀의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두려웠던 탓인지도 모른다.’(p.172)고 한다. 세계와 인간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작가는 슈만처럼 미쳐버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화자가 느낀 두려움과 망설임이 이해가 된다. 나 역시 그랬다.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가면을 그 아이의 전부라 믿지 않으려 애쓸수록 두려워졌다. '그냥 모르는 척 지낼까.'하고 뒤로 물러서고 싶은 적이 많다. 진실을 안다는 건 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고, 진실을 알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니까. 도망치고 싶었다.  


화자는 루빈스타인의 피아노는 “사람들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려 하지 않는다”면서 그의 피아노가 “가면과 민낯 사이를 바람처럼 부드럽고 경쾌하게 빠져나간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내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세상도, 사람도 추함과 아름다움이란 두 세계로 완벽하게 나뉠 수 없다. 나란 사람 역시도 가면과 민낯을 갖고 있고, 둘 중 어느 것이 진짜 나라고 답하기 어렵다. 


슈만의 <사육제>를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른 곡이 되듯이 가면과 민낯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는 나에게 달렸다. 나는 루빈스타인이 되어 ‘가면과 민낯의 경계’에서 ‘부드럽고 경쾌하게’ 삶을 연주하고 싶다. 선과 악으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그 경계에서 유연하게 보려 한다. 이 작품을 읽고 나니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졌다.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가면과 민낯 사이를 보고, 유연하게 품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교사이자 일반인이기도 한 나의 경계를 받아들이고, 능숙하게 오가고 싶다. 


하루키는 세계와 인간의 ‘가면과 민낯의 경계’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슈만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자신이 루빈스타인이 되어 ‘부드럽고 경쾌하게’ 경계에 서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이 글을 읽어보니 하루키는 어느 정도 자신의 소망대로 살고 있는 것 같다. 하루키가 되고자 하는 작가의 모습은 내가 되고자 하는 교사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와 아이들의 가면과 민낯을 인정하고,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게 끊임없이 경계에 서는 것.  진실을 대면하는 두려움을 품고 계속 애쓰는 것.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가볍게 경계에서 춤추는 것. 


이 작품에서 작가는 F*를 옹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독자를 경계에 데려간다. 그는 ‘그냥... 예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구.’하며 가볍게 말하는데, 나는 추함과 아름다움의 경계, 가면과 민낯의 경계에 서있는 듯 심각해진다. 그의 글은 부드럽고 경쾌하다. 동시에 거칠고 무겁다. 루빈스타인이 연주하는 <사육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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