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훈 씀
보후밀 흐라발 / 문학동네 / 2016.07.
이 정도면 니코스 카잔차키스만큼이나 어려운 이름이다. 보후밀 흐라발. 책의 제목은 기억하되, 과연 나중까지 이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은 아주 한참 동안 내 눈을 끌었고, 내 귀에 웅웅 거렸지만, 너무 평이 좋은 영화에 끌리지 않는 것처럼, 너무 평이 좋은 책을 일부러 집어 들지 않게 된다. 어쭙잖은 허영심의 발로가 아닌가. 하지만, 아름다운 꽃이 사람의 눈을 끄는 것처럼, 이 책을 열어보게 되었고, 나는 여러 번 읽게 될 첫 문장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그는 여러 개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준다. 그중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책임에 분명하나, 그는 책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책 속의 **나**는 꿈에 취해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간다. 그럼에도 그는 책의 마지막을 지키는 장례사로서의 역할에 심취해 있고, 그 일을 잘 해왔다.
처음에는 이 책이 **책의 파괴**에 대한 책인 줄 알았다. **화씨 451**을 떠올리며, 책을 압축하는 이 한 사람의 운명은 무엇을 말해줄지 기대하며 읽게 되었다. 그리고 곧 끝까지 읽게 되었고,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옮긴이의 말*까지 읽게 된다. 흐라발은 체코인으로 소련 침공 아래에서 자신의 책이 모두 출판금지되었었다. 프랑스로 망명한 동시대 체코 작가인 밀란 쿤데라와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글을 써야 살 수 있는 사람이 글을 쓰기는 하되, 누구에게도 읽히지 못하는 상태였던 시대, 그 시대를 살면서 저자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책 속의 **나**와 현실 속 저자의 모습은 겹쳐지는 데가 있다. 갖은 잡일을 하면서도 글을 썼다는 흐라발은 현실에서 책과 글의 파수꾼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분서란 역사의 격랑기에 꼭 있어왔던 현상이었고, 그 속에서도 책을 지키려는 사람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책을 지키려면 책이 파괴되는 자리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성공했다. 하지만, 절망은 쉽게 다가온다. 흰 우유를 마시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책을 압축해 버리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나**는 무너져 내린다.
나는 끝내 리부시의 닭 가공 공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는 살아 있는 닭들의 내장을 숙련된 동작으로 뜯어내던 여공들도 저 아이들과 똑같았다.
그 젊은 여자들도 웃고 농담을 하며 작업을 했다.
일에서 효율을 따지면, 생명은 남지 않는다. 생명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감정 없이 해낼 수 있다. 글을 써야 하는 작가가 고된 세월을 견뎌낸 것은 책들 덕분이 아니었을까. 몸이 찌푸러졌다고 느끼는 **나**는 침대 위를 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책이 주는 위안은 영속적인 것이어서, 우리의 **순간성**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화장터를 나서자 한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어여쁜 모습으로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십 년째 지하실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해온 터라 나는 습관처럼 화장터의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 보았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있어서 일까, 책을 정리하려고 띠지를 붙여둔 부분을 다시 읽다가 위의 문장에 다시 눈이 갔다. 인간은 모두 사멸하고, 먼지라고 할 만한 것 밖에 남기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두 번에 걸쳐서 봉변을 당하는 **나**의 옛 여자 친구처럼, 사람은 선택한 적 없는 어려움에 잔인하게 노출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일어선다.
자신이 일하던 곳으로 가서 책을 빻던 그 기계 속으로 몸을 집어넣는 **나**. 이쯤에서 나는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을 했다. 술에 곤죽이 되어 정말 기계 속에 몸을 밀어 넣었다고 봐야 할까? 아니, 기계의 작동에 종언을 구한 것은 아닐까? 책이 마지막을 맞이하던 장소에서 책과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한낱 인간**에서 **불명의 책**으로 이행한 것은 아닐까?
혼자되어 일하며, 가장 소중한 책을 없애는 일을 하는 삶은 괴롭다. 그가 느끼는 고독은 나눌 길이 없어서 더 가엾다.
내가 하는 일은 혼자되는 일이 아닌가? 나는 소중한 무언가를 지켜내거나 키워내고 있는가. 나는 내 고독을 나누고 있는가. 모두 예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나는 책을 찌푸러 뜨리는 저 기계 속으로 들어가 버린 **나**를 가엾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