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이 회사의 버림을 받던 날

끝이라는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by 경아로운 생각


시계를 보았다. 새벽 3:30.

집 근처 단골 마사지 샵의 조명이 희미하게 보였다. 혼자 있으려니 가슴이 터질듯하여 늦은 밤 친구를 만나 술을 잔뜩 마시고 마사지 샵으로 향했다. 시간이 가장 긴 코스를 해달라 말하고는 매트리스에 누웠다. 어떤 느낌도 나지 않았다.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의외로 없었다. 친정엄마, 남편, 후배, 친구…. 그 네 사람을 돌아가며 전화로 문자로 또는 만나서 괴롭혔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배신감, 창피함, 두려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섞인 말로 표현하지 못할 쓰나미 같은 감정이었다. 마사지 샵에서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흐느끼다 자다 울다 자다 그렇게 시계를 보니 아침 10시였다.


집 안에 있는 버릴 만한 것은 모두 버렸다. 커다란 쇼핑백으로 열다섯 개 분량이었다. 잘 안 입는 옷부터 촉감이 좋지 않은 이불, 결혼할 때 혼수로 해왔던 그릇, 1년 전 임원교육 때 받은 강의자료까지 버릴 수 있는 것들은 몽땅 버렸다.


돌이켜보면 이제껏 나는 소위 잘 나갔다. 학창 시절부터 1등을 도맡아 했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늘 빠른 진급으로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앞서 회사를 나간 분들이 퇴직 통보를 받게 되면 인정하지 못하고 회사의 험담을 하며 다닌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퇴직할 때까지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혼자 설 자신이 없기에 회사에 끝까지 목을 매는 측은하고 나약한 사람들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형편없이 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회사에 서운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오히려 ‘네 장사냐’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임원으로 지낸 지난 1년간의 과정은 보지 않고 또한 나에게 어떠한 소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성과 없음을 이유로 들어 단칼에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어 벌을 준다는 생각에 무척 서운했다.


누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임원이 되는 그날부터 무조건 충성심에 닥치는 대로 일을 만들어서 했던 것도 나였고, 어려운 상황에서 안간힘을 써서 경쟁사를 저만치 따돌린 것도 나였고, 부족한 물량을 채우기 위해 전국 돌아다니며 공장 사장님들께 읍소한 것도 나였다. 그런데도 내 공 한 마디 말하지 않았다. 다른 임원들이 트렌드 때문에 잘 나가는 것을 마치 본인이 잘한 것처럼 떠벌리고 있을 때에도 가만히 있었다. 회사가 잘 되기만을 바랬으니까. 나를 믿어준 회사만 잘 된다면 더 한 일을 해도 괜찮고,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만하라 한다. 너 아니어도 된다고 한다.

이제는 필요 없으니 저만치 뒤로 빠져 있으라 한다. 도대체 왜...


하지만 그런 회사를 원망만 하고 있기에는 내 처지가 녹록지 않다. 이제 겨우 인생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는데 남은 인생을 일하지 않고는 살 자신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돈을 벌어야 한다. 아이가 막 대학에 입학했고, 몇 년 전 퇴직한 남편도 여전히 안정적이지 않다.


집안 살림을 정리하며 회사가 나를 버릴 준비를 하면 나 또한 기꺼이 그 과정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밟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회사와 함께했던 기억들을 모두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회사 원망만 하고 살기에 내 인생은 너무 소중하고 가여웠다. 회사를 나간 이후에 그 전보다 더 성공하여 보란 듯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흐느낌으로 묻혔다.


최악의 경우 남은 인생을 폐인처럼 과거만 생각하고 지낼 생각을 하니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다.

슬픈 마음이 더 있었는데 생각이 안 난다. 아니 그 마음을 말하기에 내 표현력이 너무 부족하다.

차라리 끝을 알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가슴에 수천 개 산이 들어오고 수만 번 벌에게 쏘여도 이보다는 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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