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이루지 못할 꿈을 꾸었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사무실 안 화분에 노란색 영양제가 꽂혀 있었다. 회사에 와서 상사의 화초관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스트레스인지를 알기에 부임하자마자 팀원들에게 일러두었건만 내 사무실 화초들은 초록빛을 잃지 않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누구인지 드러내지 않는 배려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회의 들어가시죠!”
파티션 너머로 선임 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간회의 시간이 다 되어 회의 참석자들에게 알람을 주는 것 같았다. 책상 위를 대충 치우고 팀원들에게 주려고 전날 사다 놓은 음료수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어서들 와요! 우선 마시고 시작합시다!” 간식을 본 후배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더 훈훈해졌다.
기분 좋은 출발과는 달리 회의 분위기는 곧 싸늘하게 변했다. 상반기 진행할 프로젝트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팀원들이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몇 주 전부터 예정된 회의라 준비를 하기는 했을 텐데 왠지 눈치들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차례 유도하였지만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나라도 포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간단한 생각을 말했는데 뒤이어 돌아오는 선임 팀원의 반응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곧바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살폈다. 선임 팀원의 얼굴은 확실히 나를 향해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후배들에게도 하면 안 되는 표현을 회의시간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분명 상사인 나에게 하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도 흠칫 놀라는 분위기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수백만 개의 생각들이 뒤엉켜 지나갔다. 상상할 수도 없이 무례하기 그지없는 표현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하지도 못했는데 선임 팀원은 또다시 말을 이어 갔다.
“상무님이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미 정상적인 회의 진행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모두의 관심사는 선임 팀원이 던진 말의 파장과 거기에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에만 쏠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나의 자존심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선임 팀원에게 화가 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다른 팀원들 보기가 너무 민망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칠게요” 회의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에 황급히 회의를 끝냈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두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발령 후 한없이 작아져 간신히 추스르며 살고 있는데 더 한 이야기를 들으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 부서에서의 나의 위치가 사실은 허울뿐인 종이인형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날까 겁이 났다. 회사의 명이기에 원 팀으로 함께 하며 속마음을 감추고는 있지만, 어디서든 물꼬가 트이면 여과 없이 민낯이 보여질까 걱정되었다. 어렴풋한 생각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기 전에 멈추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팀원들이 나가고 난 사무실 테이블 위에는 미처 마시지 못한 음료수병들이 놓여 있었다. 쓰레기를 치우는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선임 팀원의 평소 말 습관이 여과 없이 나왔을 것이라고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참석자들이 우르르 사무실 밖을 나가는 것을 봐서는 부서원 전체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이제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상무님, 식사가시죠”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팀원 한 명이 들어와 말했다. 꽤 긴 시간 사무실 밖에서 기다렸던 것 같았다. “아, 나 생각 없어요. 다녀와요” 어색하게 돌아섰던 팀원이 얼마 후 점심거리를 사가지고 다시 내 방을 찾았다.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책임이며 후회하지 않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았다. 일의 속도를 조절하지 않은 것도 후회가 되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 같아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도 가슴은 요동쳤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무실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종의 미도 나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회사에서의 유종의 미가 이리도 어려운 것인지를 입사 후 30년 만에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