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계산된 임원사회의 규칙
임원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받은 후 처음 있는 회의라 며칠 전부터 긴장이 되었다. 같은 임원이긴 해도 맡은 업무에 따라 바라보는 차이가 있고, 내가 하게 될 업무가 중심은 아니었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미리부터 걱정되었다.
아침 8시 30분.
조금 일찍 회의실에 도착했다. 열린 문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이 느껴졌다. 이미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바뀐 역할에 따라 자리 배치도 달라져서 조직개편 후 첫 임원 회의는 늘 분주한 모습이었다. 평소보다 서둘러 올라와 자리를 확인해 두어야 여유 있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먼저 온 임원들이 열심히 테이블 위 이름표를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사팀 직원들이 안내를 도와주고 있긴 해도 전체적으로 우왕좌왕하는 분위기였다.
회의실에 들어와 몇 발짝 걸음 후 내 자리를 찾았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회의실 앞쪽까지 가보아도, 이중으로 배치된 테이블을 양옆으로 훑어보아도 내 이름표가 붙은 테이블은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분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건너뛰고 처음부터 찬찬히 살펴보려 하는데 임원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상무님 자리, 저기던데!” 그러면서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문 쪽이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멋쩍게 돌아서서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XX 담당 OOO’ 내 이름과 새로 맡은 부서가 쓰인 이름표가 눈에 띄었다. ‘아...’ 그 자리에 앉으려니 나도 모르는 탄식이 속으로 흘러나왔다. 나의 자리는 내가 지나쳐버린, 문가 첫 자리였다.
옆에 앉은 임원과 간단한 인사를 마치니 회의가 시작되었다. 승진한 임원들의 각오를 듣는 것이 회의의 첫 순서였다. 뒤이어 대표님께서 덕담을 하셨고 참석한 모든 임원들이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데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발표자와 멀리 떨어져 있어 중간중간 내용이 끊겨서 들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온통 나의 신경이 다른 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문가자리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처량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스스로에게도 창피한,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앞쪽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이어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회의가 끝난 것 같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문에서 가까운 자리라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오픈 버튼을 누르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뛰어오는 사람들을 잠시 기다렸는데 “상무님, 1년 만에 관록이 많이 생기셨네” 뒤늦게 탄 임원 한 분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네?” 의미를 몰라 짧게 묻자 “그냥 그래 보여요”라고 혼자만 아는 대답을 했다. 무슨 의미일까. 자세히는 몰라도 우선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를 내렸다. 부장 시절, 회사의 정말 높으신 분과 함께 했던 식사자리가 생각났다. 그때 나의 자리는 높으신 분의 바로 앞자리였다. 개인이 마음대로 자리를 선택할 수 없는 수십 명 식사자리에서 나는 그분과 마주 보고 식사를 하였다. 떨리고 긴장되어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그분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참 지난 후 동기에게 그 일에 대해 회상하며 진땀 나는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하니 동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앞자리에 앉았다고? 됐어, 그럼”
나는 동기가 무엇이 되었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사업무를 오래 했던 친구라 나름의 계산을 했던 것은 같은데 더는 묻지 않았다. 나의 관심사는 높으신 분께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와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였는지 뿐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반복해서 되뇌이며 혹시 했을 실수를 찾아내기에만 급급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알 것 같았다. 동기의 미소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 식사자리에서 테이블 끝쪽 부장이 왜 나를 연신 쳐다보았는지. 그리고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에 앉고 난 이후에는 조직에서의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임원회의 내내 나는 스스로 존재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받는 스포트라이트와 누군가 하는 발표에 열심히 반응해야 하는 그저 관객처럼 느껴졌다. 무대와 가장 먼 나의 위치가 그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내 바로 뒤에 있는 스낵바에 가는 사람들의 지나침도, 외부 잡음 때문에 문 닫기를 부탁하는 사회자의 요청도 그러한 나의 생각에 힘을 더하였다. 언제 나가도 주목받지 못하는 문가자리가 곧 다가올 나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아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임원을 별이라고 했던가. 칭찬으로 들렸던 그 표현이 슬프게 느껴졌다.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 가까이 있는 행성들만 주목받는 별들의 세계가 실제 임원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해마다 많은 별들이 생겨나지만, 태양 옆에 영원토록 머물 수는 없으며, 태양에서 멀어지는 순간 이름 없는 별이 되어 잊혀지고 떠다니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 많던 별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별이 아니고 싶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