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규칙
발령 후 첫 출근이다.
여느 날과는 느낌이 달랐다. 누군가는 나를 피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새 사무실에 들어오니 먹다 남은 커피와 생수병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텐데 더 큰 근심이 있어서인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퇴직 전 마지막 관문.
모두가 생각하는 그 자리로 3일 전 발령을 받았다. 줄곧 회사의 중심 부서에서 일하였던 것이 자부심이었는데 갑작스런 이동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부서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나의 앞날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직장인으로서의 마지막 자리였기에 앞으로의 한 해가 더없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령 후 짐을 싸며 줄인다고 줄였던 짐이, 커다란 쇼핑백 2개였다. 고작 3개 층 이동인데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은 13층이지만 내년엔 1층이겠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생각했다.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1년 뒤와 대입해 보는 나를 발견했다. ‘더 줄여야겠어.’ 회사를 떠날 때는 무엇하나 들고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기구, 슬리퍼, 양치 도구. 세 가지를 쇼핑백에서 꺼내고 남은 짐들은 사무실 한 편으로 밀어 두었다.
먼지가 뽀얀 노트북 바닥의 먼지를 닦고 있는데 팀원 하나가 지난 발령내용을 출력하여 가지고 들어 왔다. 당장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시키지도 않은 일을 고민 끝에 했을 정성이 고마워 받자마자 읽어 내려갔다. 새로운 별들이 뜨고, 또 다른 별들이 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나는 지는 별임을 느끼고 있는데,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K 상무. 내가 임원이 될 당시의 발령 책임자로, 대표님께 공식적인 내용을 듣자마자 내게 전화하여 내가 승진을 하기는 하나 완벽한 자격이 있지는 않으니 앞으로 지켜보겠다고 말한 인물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정말 많이 놀랐었다. 직접적인 단어로 여과 없이 표현되는 내용은 임원이 되었다는 기쁨을 주기는커녕 나를 한없이 위축되게 만들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알겠으나 의도까지 오해하게 만드는 표현 방식 앞에서, 이것이 임원들끼리의 소통 방식이라면 차라리 피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K 상무도 다른 업무를 하게 되었다. 이번 나의 자리 이동에 힘을 더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에 원망스러웠는데, K 상무 역시 자리를 옮긴다 하여 짐짓 놀랐다. 순간 씁쓸함이 느껴졌다. 회사 내에서는 영원함이란 없는 듯했다.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모든 직장인 또한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모르지 않을 텐데, 조금 더 오래 남아있기를 갈망하며 늘 불안해하는 나를 포함한 이 시대 직장인들이 가엽게 느껴졌다.
‘1년 후에 무엇을 해야 할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직장을 떠난 삶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막막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알고 있는 직업을 모두 떠올려 보아도 회사원으로만 30년 살아온 내가 할 줄 아는 일은 그 안에 없었다. 임원은 갑작스레 떠나라는 말을 들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임을 알기에 그 순간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나리라 다짐했건만, 호기를 부리기에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현실의 벽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놀이공원의 커다란 관람차가 생각났다.
탈 때 설레고, 올라갈 때 신나고, 정상에서 환호성 치지만 이내 땅에 내려와 다른 목적지로 향해야 하는, 끝이 있는 놀이기구. 내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옴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올라가는 시간에 비해 내려오는 시간은 순식간임을 알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