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내 모습
종류도 모를 새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침 8시였다. 전날 늦게 호텔에 도착해서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내내 앵앵거리며 달려드는 모기 때문에 여러 번 깬 탓인지 몸이 찌뿌둥했다.
창문을 열어보니 아담한 수영장이 눈에 들어왔다. 태국 전통 목조건물과 어울려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짙은 청록색 물빛이 햇살과 만나 마치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와’하고 절로 탄성이 나왔다. 한국에서 늘 보던 수영장의 분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수영장 한편에 마련된 선베드에 온종일 누워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하얀 구름이 드문드문 걸린 파란 하늘도 일품이었다. 늦은 시각 도착하여 하룻밤 머물 생각으로 공항에서의 거리만 보고 예약한 호텔이라 조금 걱정했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짐을 정리하다가 수첩 사이에서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다. 전날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적어준 태국 추천 관광지 리스트였다. 치앙마이까지 오는 6시간 동안 나는 줄곧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퇴직 통보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머릿속은 여전히 퇴직에 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1년 전 낯선 부서로의 발령부터 대표님께 들은 공식적인 퇴직 통보, 퇴직 후 고통스러운 심정까지 지나간 일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렸다.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는 도착 30분 전에야 알았다. 기내식을 받을 때 몸을 피하면서 언뜻 보기는 했으나 수첩에 메모해 가며 생각에 빠져 있느라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 다 되어 필기도구를 가방에 넣고 자세를 고쳐 앉으니 옆자리 승객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여행 가세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를 통해 그분 또한 몇 년 전 퇴직을 했고 내내 방황하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지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퇴직자라는 공통점 때문에 금세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분도 마찬가지였는지 퇴직 후 회사 밖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여전히 걱정이라며 아직 해법을 찾지 못해 막막하다고 말했다. 표정에서 그동안의 고민이 느껴졌다. 태국을 거쳐 말레이시아로 갈 계획이라는 그분은 헤어지기 전 숙소만 예약했다는 나에게 본인이 찾은 여행지 리스트를 적어주었다. 우리는 악수를 하며 서로 힘을 내자 격려하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 머물 숙소로 가기 전에 카페에 들렀다. 한국에서도 이미 친근한 카페였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니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관광객이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대부분 혼자 앉아 노트북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빽빽이 들어앉아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는, 지금껏 흔하게 봐 왔던 카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벽면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는데 난생처음 느껴보는 평온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데도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따뜻한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애 많이 썼다고 나를 토닥토닥 위로해 주는 것도 같았다. 한국의 가을 날씨에 약간의 더위가 더해진 듯한 기분 좋은 화창함이 예민해 있던 나의 감정들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것 같았다.
숙소를 찾아가는 동안 걸었던 도로의 풍경도 감동이었다. 길가의 풀들이 이리도 정겨운지, 하늘이 이렇게 파랗고 높은지 생전 처음 알았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바닥에서 먼지가 뽀얗게 올라오고 클랙슨 소리를 울려대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보통 걸음으로 가도 20분이면 도착할 곳을 찬찬히 살피며 가다 보니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가 너무 다정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왜 이리 편안할까? 무엇이 이토록 나를 평온하게 만들까? 단지 보여지는 풍경이 달라서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차이는 사람 같았다. 치앙마이에는 내가 아는 사람, 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껏 나는 늘 사람 안에 있었다. 특히 회사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들의 대부분은 나의 경쟁상대이거나 내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상급자였다. 나의 가장 큰 보람은 일을 통해 얻는 성취감이라고 영웅처럼 떠들어댔지만, 실상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려는 욕심을 감추기 위한 그럴듯한 포장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신나 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스스로 우쭐대는 동안 나는 점점 일만 하는 괴물이 되어 갔다. 내게 있어 사람의 의미는 나를 미친 듯이 앞으로 나가게 하는 동력과도 같았다. 사람의 의미조차 퇴색하게 만드는 회사라는 치열한 공간에서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퇴직으로 얻은 패배감이었다.
무대 위에서 입은 무거운 전신 탈을 벗은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나조차 버거웠던 내 모습이 벗겨지니 살 것 같았다. 무엇을 더 해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으니 자유로움도 느껴졌다. 떠나 산 적 없는 대한민국이 차갑게만 느껴져 더 아팠는데, 처음 만나는 치앙마이는 너무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국을 떠나오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