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혼자가 되는 이유
집 근처 공원을 걷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가깝게 지냈던 동료였다. 진급시기와 나이가 비슷하여 시기적으로 같은 고민을 나눠왔던 터라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였다.
그렇더라도 연락하지 않은 지가 몇 달인데 갑작스러운 연락에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이지?’ 잘 지내느냐는 동료의 인사에 의아해하며 답장을 쓰려는데 동료가 저녁에 시간이 있는지를 물었다. 번개 식사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동료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여 흔쾌히 괜찮다고 말하였고 그렇게 오래간만에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동료와의 식사는 즐거웠다. 간만에 마시는 맥주 한 잔에 기분 좋은 취기가 느껴졌다. 임원 계약이 연장된 동료는 나를 의식해서였는지 연신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힘을 주었는데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개인적 근황은 물론 꽤 많은 시간을 업무와 관련한 대화로 이어나갔다. 그러다 살짝 피곤한 생각이 들어 시계를 보니 밤 9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슬슬 일어서야 할 시간이었다.
“잠시만”하고 동료가 먼저 일어섰다. 계산을 하려는 것 같았다. 모른 척 동료가 자리를 뜨는 사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다시 돌아온 동료가 당황해하며 급하게 다녀올 곳이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 상황을 묻자 법인카드가 든 지갑을 차에 두고 왔다며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데 나 역시 당황되었다.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동료의 계산을 바라며 덩그러니 앉아 있으려니 왠지 모양 빠져 보였다. 다른 카드도 없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것만큼은 서로를 위해 묻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앞으로 제대로 된 준비 없이는 연락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며 내가 계산을 하는 중에도 동료는 연신 어쩔 줄 몰라하며 미안해했다.
동료와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씁쓸한 웃음이 났다. 직장인에게 법인카드의 의미를 알기에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아무리 동료와 나눈 대부분 이야기가 업무와 관련한 내용이었지만 동료와의 지난 관계를 생각했을 때 꼭 법인카드가 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없던 거리감도 느껴졌고 다음에 또 동료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단번에 약속을 잡기도 주저될 것 같았다.
그러면서 얼마 전 일이 생각났다. 아끼던 후배가 간만에 뵙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그러자 했는데, 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후배는 나를 뵙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럿 있는데 함께 와도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 또한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마음만으로 후배들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은 따로 보고 나중에 시간을 마련하자는 대답을 한 이면에는 다른 부담이 있었다.
지난날처럼 베풀 자신이 없었다. 밥 잘 사주는 선배로 통했을 정도로 후배들에게 후했던 나의 습관을 지속할 만큼 퇴직 후 형편이 녹록지 않았다. 회사 다니는 동안에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법인카드 예산이 부족하면 개인적 지출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별로 부담이 가지 않았지만 퇴직 후에는 오롯한 부담으로 느껴졌다. 여전히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기분에 휩쓸려 무분별한 지출을 하는 것은 금전적 이유를 너머 새로운 생활습관을 만들어 가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퇴직 후 만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이유 중 하나가 법인카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이래저래 계산부터 하게 되었다. 더치페이가 익숙한 세대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꺼려하는 성격이라 더욱 생각이 많아졌다. 그나마 아직 현직에 있는 상사나 동료이면 괜찮은데 후배, 그것도 여러 명이 한꺼번에 만나자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났다. 후배들은 여전히 나를 밥 잘 사주는 선배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 텐데 그 이미지를 깨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 또한 알량한 자존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밥을 사야만 이어지는 관계라면 다시 생각해 보라는 퇴직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퇴직은 참, 알아서 주변 정리를 해주는 묘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