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들은 회사 밖 첫 칭찬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바이러스는 온 세상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버렸다. 따뜻한 햇살도 부드러운 바람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공포로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퇴직을 바이러스의 한가운데에서 맞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기존 재직자들도 뒷걸음질하고 있는 터라 나 같은 퇴직자는 더욱 설 자리가 없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세상으로 나갈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사무실 출근이 불안하다고 말하는 후배를 보면 다행인가 싶다가도 이러다 영영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어느 쪽도 편치 않은 상황에서 급속도로 혼자가 돼가는 내 모습이 속상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잠시 외출할 일이 생겼다. 흔치 않은 일이라 걱정되었으나 언제까지 집에서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스크와 소독제를 꼼꼼히 챙기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니 긴장감이 가득했다. 사람들 모두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채 창밖을 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버스 내부에 ‘대화 금지’라고 쓰인 문구가 분위기를 더 경직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심하게는 서로를 감시하는 느낌도 들었다. 누구 하나 잔기침을 하면 본인에게 해가 될까 봐 눈치를 주거나 아예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두 석 장 겹쳐 쓴 마스크와 환기를 위해 쉴 새 없이 여닫히는 창문이 확실히 온 세상이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는 것처럼 보였다.
“띠리리리” 앞쪽 좌석 승객의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조용했던 버스 안의 정적이 깨졌다. 버스 안의 모든 승객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건강에 대한 염려로 모두 조심하는 분위기인데 그 승객이 어떻게 전화를 받을지 주목하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생각보다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아 깜짝 놀랐다.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받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나마 처음에는 상대방 말을 주로 듣기만 하여 괜찮았는데 점점 대화가 길어지면서 목소리가 커지더니 급기야 참기 힘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다른 승객들도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힐끗힐끗 쳐다보며 눈치를 주는 사람도 있었고 짧은 한숨으로 핀잔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기사님도 몇 번 당부하였지만, 승객은 못 들었는지 계속 통화를 이어 나갔다. 버스 안이 짜증으로 가득 찼다. 나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렵게 나온 외출인데 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었다. 불안한 시국에 한 사람의 부주의 때문에 승객 전체가 피해를 보면 안 될 일이었다. 모두가 예민해진 상황에서 다수의 안전을 위해 누구라도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마침 버스가 신호대기를 받아 잠시 정차하였다. 그 순간 나라도 앞장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통화 중인 앞자리 승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통화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나를 본 승객이 통화하다 말고 어리둥절해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못 알아듣는 얼굴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엔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통화는 짧게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들은 승객이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리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자격으로 본인의 행동을 막는 것인지 기막혀하는 것 같았다.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지만 나 역시도 꺾이지 않았다. “모두가 불편해하고 있어요. 배려 부탁드립니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뒤를 한 번 둘러보고는 마지못해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잠시 뒤 그 승객이 버스에서 내리며 나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참 내, 입만 살아가지고는! 굶어 죽진 않겠네!” 그 말을 듣는데 당황하여 온몸이 굳어졌다. 창피한 마음에 얼굴도 화끈거렸다.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내 편인 듯했던 승객들이 갑자기 남이 된 것 같았다. 모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키지도 않은 해결사를 자처했지만 망신스러운 결과만 가져왔다. 원망을 쏟아부으며 통화했던 승객이 내린 후의 버스 안 어색한 분위기는 모두 나의 몫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회사 다닐 때의 업무 습관이 나도 모르게 나와 버린 것이었다. 해결해야 하는 과제 앞에서 누군가 해야 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 왔던 버릇이 회사를 나와서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게 만들어 버렸다.
입장을 바꾸어 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과하다 싶었다. 자격도 없으면서 나선 것이 주제넘어 보였다. 통화를 했던 승객은 언짢았을 테고 다른 승객들도 나의 행동이 지나쳤다 생각했을 수 있었다.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언뜻 들으면 칭찬 같으나 실상은 칭찬이 전혀 아닌 말을 난생처음 게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듣고 난 후 충격은 너무도 컸다.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부담스러워 중간에 내리면서도 내 몸 전체에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것 같아 온몸이 아팠다.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얼룩진 또 한 번의 쓰디쓴 회사밖 경험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부딪히며 깨져야 할 내 모습이 내 안에 얼마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