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로로의 서재 월간이레 Jan 22. 2022
얼마 전, 사춘기 아들이 야단 한 마디에 가출을 하겠다며 집을 나섰다. 얼토당토않은 말에 화가 나 한참을 혼자 분을 삭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진짜 녀석이 가출을 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슬슬 몰려왔다.
그 때, 아이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아이가 외투도 안 입고 슬리퍼를 신고 등원했다며 무슨 일 있는 거냐는 내용이었다. 그러고보니 현관 앞에 아이의 운동화가 그대로였다. 소파 위에 휙 벗어던지던 외투까지 그대로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코가 반질반질 닳은 저 신발로 얼마나 너른 세상을 나가 뛰놀고 싶었을까. 녀석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마음에 미안했다.
늦은 저녁에야 들어온 아이에게 밥을 차려주며 슬쩍 말을 걸었다.
“가출을 하려면 운동화는 신고 나가. 추운 날씨에 외투도 입어야지. 가출의 기본을 모르는구나.”
국을 먹던 아이가 피식 웃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는가 보다.
그날 저녁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보다 어릴 적이 생각났다. 예의범절을 중시하던 안동 권 씨 집안의 장손인 아버지는 엄하고 보수적이셨다.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사춘기를 핑계로 투정을 부리거나 사소한 말다툼도 없이 반듯하게 자랐다.
그런 집안의 골칫거리는 나였다.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를 한답시고 아버지의 통금 시간을 어기고 매일 밤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러다 친구들이 농활을 간다길래 나도 가겠노라 어머니께 당차게 고집을 부렸다. 어머니는 우리 집도 일손이 부족한데 남의 동네까지 가서 무슨 일손을 돕냐며 화를 내셨다.
어머니 말대로 나의 살던 고향은 동요 속에 나오는 가사 그대로 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여름이면 옥수수가 무성히 자라고, 가을이면 황금 들판이 넘실대는 시골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기어이 허락도 없이 농활을 갔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야단을 고스란히 맞으며 나를 기다리셨다.
농활을 마치고 쭈뼛대며 집으로 온 내게 어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따뜻한 밥부터 내주시고는 고생했다는 한마디만 던지고 들일을 나가셨다. 집으로 오는 내내 혼날 생각에 마음을 졸이고 있던 나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집은 그런 곳이다. 무슨 잘못을 해도 온전히 나를 품어주며 내 편이 되어주는 곳. 단출한 살림살이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골집이지만 내 형제들이 태어났고 자식 농사 하나는 잘 지으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잠든 곳, 내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공기를 맡은 곳. 나에게 그 집은 강남의 수억 원대 아파트와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최고의 펜트하우스다.
나를 꼭 닮은 내 아이에게도 지금 이곳이 최고의 펜트하우스로 기억되어질까? 함께 뒹굴고, 함께 웃으며 정을 나누었으니 펜트하우스는 아니더라도 좋은 쉼터로라도 남아 언제든 머물다 가는 곳이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