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글와글 게임회사 이야기 12화
본 작품은 실제 경험의 질감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허구이며, 등장하는 회사명·인물명·사건·게임명 등은 모두 실제와 무관한 가상의 설정입니다.
최지수 선배는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회사에서 친절해 보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위로를 하지도 않았고, 누가 실수했다고 해서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같은 말을 해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신 최지수 선배는 틀린 걸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날 아침, 나는 전날 밤까지 붙잡고 있던 문서를 출력해서 책상 위에 올려뒀다. 다음 이벤트 제작 재료 수급 조정안이었다. 숫자도 다시 맞춰봤고, 유저 동선도 나름 정리했고, 운영 공지에 들어갈 표현까지 붙여놨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엔 좀 괜찮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박문태 팀장에게 바로 깨질 수준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점심 먹고 돌아오니 그 문서 위에 볼펜 자국이 빼곡했다.
빨간 펜은 아니었다. 회사에는 생각보다 빨간 펜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신 검은 볼펜으로 더 무자비하게 고쳐졌다. 제목 옆에 작게 ‘무슨 안인지 한 번에 안 보임’이라고 적혀 있었고, 표 옆에는 ‘예외 케이스 빠짐’, 공지 문구 옆에는 ‘유저는 이 표현 이해 못 함’, 마지막 페이지 하단에는 ‘이 순서대로 설명하면 중간에 질문 끊김’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한참 내려다봤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묘했다. 누가 비웃은 것도 아니고, 화를 낸 것도 아니고, 문서를 구겨 던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더 민망했다. 누군가 내 문서를 보며 내가 어디서 모자란지 아주 차분하게 표시해 놓은 느낌이었다.
옆자리의 최지수 선배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봤어요?”
“네.”
“기분 나빠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쁘다기보다… 많네요.”
최지수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죠. 근데 이 정도는 밖에 나가기 전에 안에서 맞는 게 낫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밖에 나가기 전에 안에서 맞는 게 낫다. 따뜻한 말은 아니었는데, 회사에선 그런 문장이 오히려 도움일 때가 있었다.
최지수 선배는 내 문서를 자기 쪽으로 다시 끌어오더니 첫 장을 톡톡 쳤다.
“도윤 씨 문서는 열심히 쓴 티는 나요.”
순간 기분이 조금 풀릴 뻔했다.
“근데 열심히 쓴 문서랑, 회의실에서 덜 깨지는 문서는 달라요.”
역시 거기까지였다.
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하나씩 짚었다.
“여기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왜 이 숫자인지가 먼저 보여야 해요. 안 그러면 사업 쪽은 바로 체감 질문할 거고, 개발 쪽은 왜 이 타이밍에 또 바꾸냐고 할 거예요.”
그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여긴 유저 동선 써놓은 건 좋은데, 실제로 사람들이 어디서 짜증날지 순서가 없어요. 우리가 보기 쉬운 순서랑 유저가 짜증나는 순서는 달라요.”
또 넘겼다.
“그리고 공지 문구. ‘구조적 개선’ 이런 말 쓰지 말아요.”
“왜요?”
“유저는 그런 말 안 써요. 우리가 덜 욕먹으려고 쓰는 말이지.”
나는 웃음이 조금 났다. 맞는 말이었다. 회사 문서는 자주 사람보다 회사를 먼저 보호했다.
최지수 선배는 웃지 않았다.
“문서는 똑똑해 보이려고 쓰는 거 아니에요. 질문을 덜 받으려고 쓰는 거지.”
그 말은 너무 정확해서 메모해두고 싶을 정도였다.
오후 내내 나는 수정했다. 제목을 고치고, 순서를 바꾸고, 예외 케이스를 추가하고, 공지 문구를 더 짧게 바꿨다. 최지수 선배는 중간중간 내 화면을 힐끗 보더니 손가락으로 딱 한 군데씩만 짚었다.
“여기서 끊겨요.”
“이 문장은 길어요.”
“이건 회의실에서 누가 읽어도 같은 뜻이어야 해요.”
한 번도 친절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제일 많이 배우는 건 이 시간이었다. 윤성호 팀장에게선 회사의 공기를 배웠고, 한정우 대리에게선 순서를 배웠고, 박문태 팀장에게선 무서움을 배웠다. 그런데 최지수 선배에게서는 처음으로 실무의 모양을 배웠다. 남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는 법, 질문을 덜 불러오는 순서, 괜히 있어 보이는 말보다 실제로 통하는 말.
저녁 무렵, 수정한 문서를 다시 넘기자 최지수 선배가 이번에는 페이지를 빨리 넘겼다.
“됐어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기뻤다. 칭찬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회사에서는 가끔, ‘좋아요’보다 ‘됐어요’가 더 큰 인정처럼 들릴 때가 있었다. 더 고칠 데 없다는 뜻이니까. 적어도 지금 수준에선 창피하진 않다는 뜻이니까.
실제로 그날 저녁 회의에서도 그 차이는 바로 드러났다.
예전 같으면 내 문서는 첫 장부터 질문에 끊겼다. 제목이 왜 이렇냐, 이 숫자는 왜 이 숫자냐, 예외 케이스는 어디 있냐, 공지 문구는 누가 이해하냐. 그런데 수정한 문서는 처음으로 중간에 덜 끊겼다. 윤성호 팀장은 페이지를 넘기며 필요한 것만 짚었고, 박문태 팀장도 두세 군데 물어본 뒤 더 길게 잡아늘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문서가 칭찬받는 것보다, 별일 없이 끝나는 쪽이 실무에선 더 큰 통과라는 걸.
그 통과를 만든 사람이 최지수 선배라는 사실이 더 또렷해졌다.
회의가 끝난 뒤 최지수 선배는 별말 없이 내 문서를 접어서 돌려줬다. “이제 좀 보죠?” 같은 말도 없었다. 대신 형광등 아래에서 눈을 한 번 비비더니 바로 다음 일정표를 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조차 자기 업무 사이에 끼워 넣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이상하게 더 믿음직했고, 이상하게 더 피곤해 보였다.
나는 괜히 물었다.
“선배는 원래 문서를 이렇게 잘 봤어요?”
최지수 선배는 대답 대신 모니터 한쪽의 메신저 창을 닫았다. 빨간 숫자가 여러 개 떠 있었다. 운영 쪽 문의, 사업 쪽 확인 요청, 다음 이벤트 일정표, 주말 로그 정리. 그걸 보니 질문이 좀 바보 같아졌다. 잘 본다기보다, 안 볼 수 없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잠깐 뒤에 말했다.
“원래 잘 본 게 아니고, 예전에 많이 깨졌죠.”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이상했다. 최지수 선배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을 것 같았다. 뭐든 빨리 보고, 정확히 짚고, 남들보다 덜 흔들리는 사람. 그런데 그 말 한마디로 갑자기 선배도 예전에 누군가 앞에서 창피했던 적이 있었겠구나 싶었다.
“그럼 지금은 안 깨져요?”
내가 묻자 최지수 선배가 아주 잠깐 웃었다.
“지금은 덜 티 나게 깨지죠.”
그 말이 너무 회사 사람 같아서, 웃기면서도 조금 서늘했다. 회사에서 성장이라는 건 완전히 안 깨지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깨져도 티를 덜 내는 쪽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밤이 조금 늦어졌을 때, 최지수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한 번 돌렸다. 화면 불빛 때문인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종일 별말 없이 일했는데도 피곤이 몸 밖으로 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일을 제일 잘하는 사람은 늘 여유로운 줄 알았는데, 회사에 와서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일 잘하는 사람이 제일 많이 붙들려 있었다. 다들 찾고, 다들 물어보고, 다들 기대했다. 능력은 인정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호출 버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최지수 선배가 가방을 들며 말했다.
“도윤 씨.”
“네.”
“문서 쓸 때, 내가 이해했는지는 제일 마지막이에요.”
“그럼 뭐가 먼저예요?”
“저 문서 볼 사람들 표정.”
나는 그 말을 바로 적어두진 못했다. 대신 오래 기억했다. 회사 문서는 종이 위에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 얼굴을 보고 쓰는 것이었다. 누가 어디서 인상을 찌푸릴지, 누가 어떤 표현에 바로 책임을 돌릴지, 누가 어떤 숫자에서 질문을 멈출지. 그런 걸 조금씩 아는 사람이 실무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날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최지수 선배는 따뜻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그렇게 보이기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 회사에서 나를 제일 덜 창피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그 선배였다.
좋은 선배라는 말은 생각보다 포근하지 않았다.
가끔은 내가 망신당할 장면을
조용히 하나씩 지워주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개,
생각보다 오래 지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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