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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Apr 22. 2022

부티와 함께 신나는 구보를


불로뉴숲은 정말 이름 그대로 '숲'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산책로나 잔디밭이 간간이 보이긴 했어도 면적으로 따지면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듯 했다. 겨울인데다 날씨가 조금 흐려서 싱그러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파리 is 뭔들' 필터와 '첫 외승' 필터가 씌워진 내 눈에는 그 모든게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운 낭만으로 느껴졌다.


누군가는 이 숲에서 산책을 하고,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또 누군가는 ATV를 탄다. 나는 말을 타고 달렸다. 처음으로 승마장 울타리를 떠나 자연 속에서 말을 탄다는 것도 설렜지만, 이렇게 '말을 타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이 장소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흥분되는 일이었다.


숲에서 만난 파리지앵들은 말을 탄 우리를 보고 멋있다며 엄지척을 해줬다. 이 프랑스인 가이드 아저씨는 MBTI가 E이신듯 연신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걸고 인사를 했다. 산책을 하고 있는 대형견 무리를 만나는 일도 이곳에선 일상이었다. 한국에선 대형견 한 마리만 지나가도 시선집중인데. 이 숲 속에선 그런 대형견들이 한 무더기가 있어도 자연스러웠다.


"괜찮아요. 부티는 이런거 익숙해요. 부티를 믿으세요."


개 한 마리가 부티를 보고 신이 난건지 반가운건지 쫓아오자 Baptiste 아저씨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라 외승을 나가면 비닐봉지만 굴러가도 말이 놀래서 낙마할 수도 있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었는데 부티는 비닐봉지는 커녕 셰퍼드가 쫓아와도 여유만만이었다.




말의 걸음걸이는 속도에 따라 크게 네 단계로 구분이 된다. 편하게 산책하듯 걷는 평보, 조금 발랄하게(?) 걷는 속보, 약간 빠르게 '다그닥다그닥' 달리는 구보, 그리고 전력질주하는 습보가 있다. 물론 각각의 걸음걸이는 평보이지만 조금 빠르게, 구보이지만 조금 느리게, 이런 식도 가능하다. 그걸 통제할 수 있는 기승자도 대단하고 그 명령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말도 신기하기 그지없다. 인간과 동물이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의사소통이 될 수 있다.


그래도 프랑스 가기 전에 구보 정도는 배워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외승 프로그램 예약을 하고 파리 출국까지 남은 한달의 시간동안 매 주말마다 4시간씩 말을 탔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4시간씩 승마를 하니 통장 잔고가 아주 빠른 속도로 말라가는 게 보였다. 그래도 지금은 돈을 아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써야할 때는 써야 한다. 그 때가 바로 그 '써야할 때'였다.


주말 아침 8시도 되기 전에 찾았던 겨울의 승마장


하지만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도 나는 구보를 배우지 못했다. 운전면허 시험도 아니고 속성으로 가르쳐달라고 할 수는 없어서 (아 물론 운전면허 시험도 속성으로 배우면 안된다. 운전면허 속성으로 가르치지 마세요 제발.) '아직 난 멀었나보다'하고 마음을 비웠다. 그리고 운명의 출국 전 마지막 연습시간이 됐다.


"회원님 구보 해보셨어요?"


드디어! 교관님의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짐짓 무심한척(?)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교관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말에게 구보 사인을 넣자, 신기하게도 말이 '다그닥다그닥' 달리기 시작했다. 구보 사인이라는건 어디 사극에서 많이 나오듯이 "이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게 아니라, 다리로 말 몸에 힘을 줘서 신호를 하는 것이다. 그 힘을 어느 부위에 어떤 방식으로 주느냐가 관건이 된다. 그러고보면 승마를 배우는 동안 "이랴!"라는 말은 단 한번도 배우지도, 쓰지도 않았는데 그런 구호는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르겠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대가 끊겨 버린 한국식 마술(馬術)의 하나였을까.


첫 구보는 신기하긴 했지만 그닥 성공적이진 못했다. 뭔가 편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교관님은 연신 "앉아서! 앉아서!"를 외치셨으나 엉덩이는 자꾸 공중에 방방 떴고, 말은 그런 초짜 기승자가 불편했는지 몇발짝 뛰다말고 걸음을 멈춰버렸다. 그래도 프랑스 가서 '구보 한번은 해봤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그 상태로 불로뉴숲에 오게 된 것이었다.




프랑스인 가이드 아저씨가 속보든 구보든  하라고 이야기하면 알아는 들어야 하니, 승마용어들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찾아봤다. 프랑스의 놀라운 외승코스들을 소개해놓은 웹사이트를 보면서  코스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canter and gallop   있어야 한다, 이런 글귀들을 발견했다. 특히 어떤건 하루에 6시간씩 gallop 해야 한다는 난이도의 것들도 있었다. 여기서 'canter' 내가 얼마  배운 구보다. 그럼 gallop 뭐지?


이 gallop이 바로 말 걸음걸이 중 최고 단계, '습보'였다. 모 자동차 브랜드 덕분에 gallop이란 단어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정작 말이 gallop한다는 게 어느 정도 속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진으로 설명된 것을 봐도 감이 잘 안와서, 유튜브 찬스를 썼다. 검색창에 'gallop'이라고 검색을 하니 몇 가지 영상이 떴는데 하나같이 입이 떡 벌어지는 장면들이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을 말그대로 '전력질주'하는 사기스런 영상들이 이어졌다. 심지어는 셀프로 촬영한 영상도 있었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한 손에는 고삐를 쥐고 gallop을 하시던 그 여성분은 바람에 카우보이 모자가 날아가자 재밌다는듯 웃었다. 마장 안에서 말이 겨우 조금 빠르게 걷는 정도의 속도만 경험했던 나로서는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요즘도 이렇게 말을 타고 신나게, 자유롭게 달리는 게 가능하구나.'


나는 또 이런 도시촌년스런 생각을 하며, 존경의 눈빛으로 gallop 영상들을 감상했다.




"Canter?"


Baptiste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자 부티는 내가 구보 사인을 넣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내가 한국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자세를 알려주셨다. 속보를 할 때도 계속 일어났다 앉았다하면 힘드니까 그냥 계속 일어나 있으라고(네?) 했다. (이 '일어났다 앉았다'가 뭔지 궁금하신 분들은 <첫 기승의 날카롭고도 따뜻했던 추억> 편을 참고해주세요-https://brunch.co.kr/@k17jina/3) 그리고 균형잡기가 힘들면 말 목에 손을 대고 있으면 된다는 거였다.


한국의 교관님이 말 목은 잡으면 안된다고 했었는데. 일단 여기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니 고삐 쥔 손을 살짝 부티의 목에 대고 엉덩이를 든 채 일어나서 타보았다. 그랬더니 속보도, 구보도, 부티가 좀더 편하게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에 걸리적 거리는게(?) 없어서 그런걸까. 생각보다 나도 그런 자세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부티와 한 몸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조금 익숙해지자 나는 살며시 부티 목에 댄 손을 뗐다. 어쨌거나 누가 내 목덜미를 잡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해도 균형을 잃어서 엎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신기했다. 부티는 더 신나게 달렸다. 부티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내 얼굴에 번진 웃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날아갈 것만 같다'는 게 이런거구나. 부티도 표정을 지을 수 있었으면 나처럼 웃는 얼굴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부티와의 신나는 구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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