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a Apr 15. 2022

초식동물과 숲에 가면 생기는 일


파리여행이라고 한다면 뮤지엄을 가고, 거리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와 마카롱을 먹고, 백화점에서 명품 (아이)쇼핑을 하고, 에펠탑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일들을 상상하곤 했다. 파리에 몇번째 가는 것이라도 이 패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에 갔던 뮤지엄이 아닌 다른 뮤지엄을 가거나 다른 카페와 백화점을 가는 정도의 베리에이션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파리는 언제나 좋았다. 남이 뭘하든,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는 듯한 여유와 시크함이 어쩐지 해방감을 주는 도시였다.


불로뉴 숲은 그런 파리여행의 기본메뉴에 없던 목적지였다. 아마 보통의 관광객들이라면 역시 별로 관심이 없지 않을까 한다. 이 숲에 있는 '롱샴(longchamp)'이라는 지명에 눈이 번쩍 뜨였다가 그게 상상하던 가방 매장이 아니라 경마장 이름이란걸 알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있을지 몰라도.


"파리에 이렇게 갈데가 많고 볼게 많은데 파리까지 가서 '숲'을 왜 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사실 파리는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 공원과 숲이 많고 또 아름답다. 파리의 활기는 대부분 이런 도시 속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 같았다. 튈르리 정원을 '파리지앵들의 휴식처'라고 부르고 불로뉴 숲과 방센느 숲을 '파리의 폐'라고 하는 것은 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나도 이번에는 파리지앵들처럼 공원과 숲을 마음껏 즐기다 왔다. 이 나라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스포츠, 승마를 하게 된 덕분에.




불로뉴 숲은 파리의 서쪽 끝에 있었다. 숲을 가로지르는 차도가 몇 개나 있을 정도로 큰 숲이었다. 버스 정류장이 승마 가이드 아저씨와 만날 장소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익숙한 시내에서 벗어나니 역시 약간 낯설었다. 오늘 예약을 다시 확인하지 않았는데 혹시 바람 맞으면 어떡하지, 란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돌아갈 버스표를 사오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다. 택시를 타려고 해도 어디서 타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거대한 숲에서 난 미아가 되는 걸까 라는 공상이 끝나갈 때쯤, 딱 봐도 말을 태운 것처럼 보이는 트럭 한대가 나타났다.


"봉주ㅎ, 내가 너랑 이메일로 연락했던 Baptiste야."


미스터빈을 닮은 아저씨가 트럭에서 내려 나를 알아보고 곧장 와서 인사를 하셨다. 이 주변에서 승마복장을 하고 멀뚱히 서 있는 사람이 나 뿐이었기 때문에 못 알아볼리가 없었다. 아저씨가 몰고 온 트럭은 언뜻보면 캠핑카 같았다. 말을 어떻게 데려오는걸까 궁금했었는데, 짐칸은 말이 서 있어도 충분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말을 태운 자리는 작은 창문도 여러 개 있고 바닥엔 폭신한 건초가 깔려 있어서 나름 안락해 보였다. 여기까지 출장 나오느라 너네도 고생이 많구나, 싶었다.


나의 첫 외승을 함께 한 부티Beauty와의 데면데면한 첫 만남


이 날은 설마 나 혼자 타나 했더니 정말 나 혼자뿐이어서 말도 가이드 아저씨가 탈 녀석까지 단 두마리였다. 원래 겨울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고 했다. 낯선 동네에서 낯선 말을 타고 영어도 불어처럼 하시는 프랑스인 아저씨와 둘이서만 승마를 한다는 그림인데, 이 그림이 잘 완성이 될까 불안하면서도 묘하게 흥분이 됐다. 어쩐지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이날 내가 타게 된 말의 이름은 Beauty(부티)였다. 그 이름처럼 굉장히 예쁘게 생긴 말이었다. 갈기는 황금빛이었고 네 다리에는 하얀 무늬가 딱 발목까지만 있어서 양말을 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럽 사람들은 보통 덩치가 나보다 크니 말도 큰 말을 타지 않을까 해서 약간 쫄았었는데, 부티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한국에서 탔던 한라마(*제주마와 더러브렛의 교배종)와 비슷한데 약간 크다는 느낌이었다. 프로그램을 예약할 때 키, 몸무게 같은 신체 사이즈를 물어보길래 미리 알려준 게 있었다. 아마 거기에 맞춰서 말을 데려오는 걸테다.


부티와 처음 만났을 때는 데면데면했다. 부티도 외국인인 내가 낯설었던 걸까. 셀카를 좀 찍어보려고 해도 부티가 자꾸 얼굴을 돌려서 쉽지 않았다.


나는 어딘가 울창한 숲속까지 트럭을 타고 이동할 줄 알았는데, Baptiste 아저씨는 가까운 길가에 대충 주차를 하고 말을 차에서 내렸다. 음? 여기서부터 말을 타는건가. 옆에는 차들이 달리고 있고 여기가 파리 불로뉴 숲의 어디쯤이라는 것만 빼면 말그대로 그냥 '길거리'인데.


사방이 막혀 있는 안전한 마장을 떠나 이런 노상에서 자전거 타듯이 말에 오르는 것이 어색했지만, 상대적으로 부티는 좀 신나 보였다. 내가 등에 타고 있건말건 상관없이 풀이 무성하게 난 곳을 찾아 정신없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Baptiste 아저씨가 말했다.


"여기서는 풀 먹게 해도 돼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때까지만 해도 난 미처 몰랐다. 풀을 좋아하는 동물과 숲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내가 말이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그날이 살면서 처음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영화나 드라마 속이 아닌, 진짜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는 말을 본 적은 없었다. 부티는 정말 맛있게도 풀을 먹었다. 그 사이 Baptiste 아저씨도 준비를 끝내고 이제 드디어 출발할 시간이 됐다. 신나게 풀을 뜯어 먹던 부티는 내가 고삐를 당기며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경쾌하게 움직였다. 아쉬운듯 입속에 풀데기를 한가득 넣은채로.


'아 그래, 말은 원래 초식동물이지.'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올 것 같은 상식을 되뇌며, 부티와의 첫 외승을 시작했다.




파리에서 외승을 하기로 생각했을 때 가장 걱정이 됐던 점은 낙마를 하거나 길을 잃거나 뭐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을 잘 출발시키지 못할까봐, 였다. 아무리 박차를 넣어도 말이 '아 몰랑 운동하기 싫어요'라고 말하듯이 우두커니 서 있으면 나는 말 등에 앉은채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움직이게 만들면 이번엔 추진이 약하다고 한 소리씩을 들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배운 모든 것을 다 해보는 데도 말의 속도가 잘 올라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교관님들이 나에게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말을 활발하게 보내라'를 것이었다.


"저도 활발하게 보내고 싶어요ㅠㅠ"


그럴 때면 채찍을 손에 쥐어 주시곤 했는데 이걸 손에 들고만 있어도 갑자기 말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느껴진다. 요녀석들 운동하기 싫어서 게으름 피우는 거였구나 싶다가도 안쓰러운 마음에 정작 채찍은  못쓰 편이다. 그냥 말의 시야에 보이게 들기만 해도 효과가 있어서 굳이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가끔 마장 입구에서  들어가겠다고 버티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게  얘들도 일하기 싫어서 그런거였나 싶다.


걱정과는 달리 신나게 달려준 부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무튼 그런 상황이 이런 낯선 타지에서 벌어진다면, 이라고 상상하니 온몸이 오그라들었던 거다. 하지만 그건 다 기우였다. 부티는 내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이미 신나게 걷기 시작했다.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문제이겠으나, 석달짜리 승린이었던 나는 말을 출발시키는 걱정에서 벗어난 것에 그저 안도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좀 풍성하고 야들야들해보이는 풀이 있으면 부티는 잘 가다말고 정신없이 뜯어 먹었다. 겨울이지만 우리나라만큼 춥지 않은 파리의 숲은 초록빛의 풀이 많았다. 아무리 고삐를 붙들고 있어도 풀을 먹겠다는 부티의 의지 앞에서 나는 주유소 앞 풍선인형 마냥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Baptiste 아저씨는 그런 내가 답답한지 한 마디 하셨다.


"단호하게 못하게 해야 돼요. 안 그럼 베르사이유 가면 풀 천지인데 걔 거기 가서 풀만 뜯어먹을거에요."


아니, 애 아침 굶겼어요..?




부티의 풀사랑을 말리기 위해 고삐를 잡아당기다보니 전날 산 새 장갑이 금새 너덜너덜해졌다. 몇번 당한(?) 나는 요녀석이 좋아하는 풀이 어떤건지, 어디쯤에서 또 풀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일지 낌새를 알아채고 고삐를 더 단단히 잡게 됐다. 그러자 부티도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신나게 걷다가 걸음이 조금 느려지면서 풀을 뜯어먹을 타이밍을 노리는 게 느껴졌다. 이런게 말과의 교감이라는 걸까.


"부티, 안돼. 안된다고 했다?"

"이따가 먹게 해줄께. 일단 지금은 가자, 응?"


부티는 난생 처음 한국말을 들어봤을테지만 어쩐지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풀을 못 먹게 하니 이번엔 옆에 있던 나무의 잎사귀를 뜯어내 걸으면서 먹는 신공을 보여줬다. 그러면서도 움직이기 싫다고 버티지는 않았다. 겨울에는 외승 손님이 별로 없다고 했으니, 부티도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를 나와 신이 났던게 아닐까 싶었다.


한평생 이런 자연을 한번도 만끽하지 못하고 승마장 울타리 안에서 뺑뺑이만 도는 말들도 있겠지. 문득 내가 다니는 한국의 승마장 말들이 생각나서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이전 06화 파리에서의 아주 특별했던 쇼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