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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Apr 08. 2022

파리에서의 아주 특별했던 쇼핑



코로나시대의 여행은 참으로 신경쓸게 많았다. 예전이라면 비행기표 끊고 호텔 예약하면 거의 여행준비의 절반 이상이 끝났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중요한 퀘스트가 하나 남아 있었다. 내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현지에 무사히 입국할 때까지, 아니 현지에서 다시 한국으로 출발할 때까지 안심할 수도 없는 성가신 퀘스트였다.


그전까지 PCR 검사도 별로 할일이 없었던 나는 파리여행을 다녀오면서 총 4번의 코쑤시기를 당했다. 파리로 입국하는 데 필요한 PCR 음성확인서를 받기 위해 한번,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현지에서 또 한번, 한국에 오자마자 또 한번, 격리해제되기 하루 전날 또 한번. 왜 PCR 검사는 한국이고 프랑스고 왼쪽 콧구멍만 노리는건지. 매번 '다음번엔 오른쪽에다 해달라고 해야지' 생각은 하지만 미처 입밖으로 내뱉기 전 이미 면봉은 왼쪽 콧구멍 속에 돌진해 와있곤 했다.


PCR 검사를 해야 하는 시점도 나라마다 제각각인데다가 자꾸만 규정을 바꿔대는 통에 불안함은 사라질 틈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는 건 될대로 되란 심정이었지만 (설마 자국민을 PCR 검사 제대로 안했다고 난민으로 쫓아내기야 하겠냐는 심정) 검사를 잘못 해가서 프랑스 입국을 거절당하고 울면서 돌아오는 일이 생길까봐 노심초사였다. 파리로 떠날 날이 가까워졌을 즈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밥도 먹지 않고 만전을 기했다. 그걸로 누가 뭐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내가 당신이랑 밥먹다가 코로나 걸려서 파리 못가면 책임질거야?" 실제로 그럴 일은 없었지만 그만큼 나는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서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도 다 추억이 될까.




파리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나의 사치스런 작은 호텔방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이번 여행의 시작을 마음껏 축하할 수 있었다. 토요일 밤 11시, 호텔에 미리 부탁해놨던 샴페인을 방에서 혼자 터뜨리는 것으로 일주일간의 돈잔치 일정을 시작했다.


일단 다음날인 일요일은 문을 여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자는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온 프랑스 백신패스가 잘 작동되는지도 확인할겸. 작동이 안되면 뭐 어때. 길바닥에서 샌드위치를 사먹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우선 아침에는 호텔에서 가까운 튈르리 정원으로 산책 갔다가 마치 파리지앵인 척 카페 알롱줴를 사 마셔야지.


일요일 아침의 튈르리 정원


그리고 화요일은 꿈에도 그리던 첫 외승을 가는 날이다. 오전에는 불로뉴숲에서, 오후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중간에 이동하고 밥먹는 시간 빼고 총 4시간 말을 타기로 돼있었다. 난 원래 2시간, 2시간씩 다른 날에 타고 싶었으나 비수기라 그런지 하루로 날짜를 몰아주셨다. 그런데 하필 이날이 저녁에 오페라 보러가는 날이었던 거다. 낮에 4시간 말타고 밤에 클래식 공연을 본다는, 돈과 체력을 아주 그냥 전력투구해야 할 스케쥴이었다.


원래는 여행일정이 일주일보다 조금 짧았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기 위한 PCR 검사를 출국 48시간 전에 해야 하다보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저 4시간 승마 + 오페라 공연관람의 날 아침에 새벽같이 가서 검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6시쯤에 일어나 추운 겨울 아침 예상대기시간 약 1시간 동안 밖에서 덜덜 떨며 기다렸다가, 검사소 오픈 시간에 맞춰 1빠로 PCR 검사를 하고, 10시까지 불로뉴숲으로 가서 4시간 말을 탄 후,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클래식 관람용 드레스코드로 환복을 하고 바로 오페라극장으로 가야했다. 공연이 끝나는 시간은 대략 밤 11시. 이건 그냥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코로나에 걸리기 전에 몸살감기에 걸려 앓아눕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일정을 이틀 연장했다. 그리고 늘어난 시간동안 결국 승마를 하루 더 했다.




화요일에 승마를 가려면 월요일에는 쇼핑을 해야 했다. 명품백도, 기념품도 아닌 바로 승마장비 쇼핑을. 외승 프로그램에 기본적으로 장비 대여가 포함돼 있었지만 첫 외승만큼은 멋진 개인장비들로 쫙 빼입고 가고 싶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까지 청바지와 운동화 패션으로 말을 탈수는 없었다! 물론 그건 파리에서의 승마장비 쇼핑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원래는 월요일 오전에 뮤지엄을 몇군데 가고 오후에 쇼핑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점 찍어놨던 승마장비 브랜드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원래 가려고 생각했던 매장에 내가 마음속에 미리 골라둔 제품들이 없다고 나오는 거였다. 이럴수가. 다행히 다른 매장에는 재고가 있었는데 뭔가 그 매장은 구글 스트리트뷰로 봤을 때 그닥 규모가 커보이지 않아서 제껴놨던 곳이었다. 불안했다. 다음날 베르사이유 궁전 가야하는데. 멋지게 입고 오스칼님처럼 말 타고 싶은데. 지금 뮤지엄이나 갈 때가 아니었다. 만사 제쳐두고 나는 그 재고가 남아 있다는 매장으로 향했다.


'불어도 못하는데 잘 살 수 있을까?'


지하철에서 내려 목적지 도착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아니, 오히려 불어를 못하는 나를 안쓰럽게(?) 본다. 딱 봐도 외국인인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불어로 말을 걸곤 했다. 내가 못알아듣고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면 "어머, 너 불어 못하니?" 하면서 그제서야 선심쓰듯 영어로 말하는 파리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십수년 전 처음 파리에 왔을 때보단 영어가 잘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승마장비'라는 낯선 아이템을 무사히 내가 원하는 걸로 잘 살 수 있을지 뒤늦게 현타가 온 것이었다.


파리의 흔한 승마장비 매장 풍경


예상했던대로(?) 매장 점원은 영어를 거의 못했다. 그리고 내가 할 줄 아는 불어라고는 "봉주ㅎ(안녕하세요)", "메ㅎ시(감사합니다)", "오ㅎ부아ㅎ(안녕히계세요)" 정도 뿐이었다. 분명 수능 제2외국어를 불어로 봤었는데 내가 배운건 오로지 시험용으로 공부한, 필드에선 무쓸모인 지식놀음에 불과했다는걸 깨달았다.


"I need everything."


나는 최대한 간단하고 쉬운 영어로 나의 목적을 설명했다. 다행히 점원은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나를 매장 안쪽으로 데려갔다. 여기 규모가 작아보여서 물건이 많지 않을까봐 불안해했던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안으로 안으로, 또 지하로 미로 같은 공간을 따라 승마장비의 '산'이 쌓여 있었다. 분명 밖에서 봤을땐 작은 가게인것 처럼 보였는데. 마치 해리포터의 '늘리기 마법'이 걸려 있는 곳 같았다.


사이즈만 안다면 말없이 입어보기만 해도 되는 '구매난이도 하'의 바지를 2개 고르고 나자 본격적으로 점원과 나의 사투가 시작됐다. 점원은 산처럼 쌓여 있는 승마장비의 더미 속에서 나에게 맞는 부츠와 헬멧을 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냥 호구 취급하면서 대충 비싼걸로 몇 가지 골라주고 뭘 물어도 못 알아듣는척 할 수도 있었을텐데. 정말 정성스럽게도 하나하나 사이즈 재고, 잘 맞냐고 묻고, 이 제품의 장점이 뭔지, 다른 제품과 뭐가 어떻게 다른지 핸드폰으로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설명해주려 애쓰는 모습에 리얼로 감동을 느꼈다. 내가 불어를 못하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보호조끼와 자켓까지 고른 후, 이 모든 것을 담아갈 수 있는 가방도 하나 달라고 했다. 처음에 점원이 갖고 나온 가방은 어느 승마선수의 브이로그에서 시합 나갈때 갖고 다니는 가방이라며 보여준 너무나 프로페셔널한 사이즈의 것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 "이건 너무 크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또 다시 승마장비의 산을 뒤지고 뒤져 그 안에 잠자고 있던 조금 작은 가방을 기어이 찾아내 가지고 나왔다. 나는 그냥 어깨에 맬 수 있는, 그래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때 핸드케리할 수 있는, 스포츠가방 같은걸 상상했는데 거기엔 부츠가 다 안들어간다고 그녀가 단호히 못을 박았다. 다른 때였으면 이 자식이 비싼거 팔아먹으려고 오바하는거 아냐 라고 의심을 품었을테지만 이 점원의 서비스 정신과 진정성을 이미 충분히 경험한 뒤라 고분고분 그녀의 말을 따랐다. 비행기 탈때는 어떡하지, 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이 정도 가방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더 고민해봤자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거의 명품백 1개 값의 가격을 지불하고 텍스프리 서류까지 야무지게 받은 후, 따끈따끈한 승마장비들로 가득 채운 가방을 끌고 호텔로 돌아갔다. 나는 구글지도를 켜고 그 매장을 찾아 리뷰를 달았다. 구글이 번역하기 쉽게(?) 쉬운 말로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처음 승마를 시작해서 모든 장비를 다 사야했어요. 제가 불어를 못해서 설명하기 곤란하셨을텐데 친절하게 좋은 상품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날, 새로 산 옷과 장비들로 한껏 꾸미고 길을 나섰다. 승마바지에 부츠를 신고 한쪽 어깨엔 헬맷이 담긴 주머니를 맨채 파리의 거리를 활보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구글이 알려주는 대로 파리 외곽에 있는 낯선 거리의 정류장에서 내렸다.


나의 첫번째 외승지, 불로뉴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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