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2년 4개월만에 떠나는 해외여행길이었다. 코로나 이전 마지막 목적지는 뉴욕이었는데, 졸업하고 그나마 모아두었던 돈을 탈탈 털어서 다녀왔다. 적지 않은 돈이었음에도 뉴욕의 미친 물가에 비하면 빠듯한 예산이었다.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은 죄책감 비슷한(누구에게 죄책감?)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왠지 가야할 것만 같아서 두눈 딱 감고 질러버렸다. 그리고 코로나 암흑기 2년을 보내며 그때 나의 선택이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지 스스로를 칭찬하곤 했다. 역시 돈은 있을 때 써야 하고 여행은 갈 수 있을 때 가야 한다. 앞으로 이 말을 우리집 가훈으로 삼을까 싶다.
그렇게 다시는 해외여행을 못갈 것만 같던 나날이 이어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미국, 유럽 같은 나라들은 백신 생산과 접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일찌감치 국경의 빗장을 풀었고, 우리나라도 백신접종을 완료한 사람에게 자가격리를 면제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달력을 뒤적였다. 그리고 2월 초에 있는 아름다운 연휴를 발견했다. 이틀만 휴가를 내면 미국이든 유럽이든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뉴욕여행 때의 결단이 얼마나 신의 한수였는지를 떠올리며 구글 지도를 켰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이 천금같은 기회를 어떻게 살리면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멋있는 호레이시오 반장님이 계신 마이애미? 대학생 때 배낭여행으로 한번 가보고 업데이트가 안된 런던? 다들 좋다고 이야기하는 샌프란시스코? 시간과 돈이 모두 있으니 정말이지 행복한 고민이 이어졌다. 이게 둘다 있는 타이밍이 인생에 몇번 없을텐데. 겨울이라는 점이 약간 아쉬웠지만 그것까지 아쉬워하면 지나친 욕심인 것 같아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니가 좋아하는 파리나 한번 더 갔다 오는게 어때?"
고민하던 나에게 누군가가 던진 이 한마디는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마냥 내 마음을 동요시켰다. 파리. 생각만해도 설레는 파리. 내가 유럽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 파리. 그래, 파리를 가자. 지난번처럼 4인실 게스트하우스에서 청승떨지 말고 시내 좋은 호텔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오페라도 보고, 와인도 실컷 마시고 오자. 파리는 이미 3번이나 다녀온 도시였지만 또 가고 싶었다. 그건 운명이었을까. 파리에서 말을 탈 운명.
남들은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백을 살때, 개선문 근처 지하 매장에서 승마장비를 살 운명.
그렇게 파리행 티켓을 끊고 얼마 후, 난 승마를 시작했다. 보통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면 옷이며 장비를 새로 사고 싶기 마련이다.(나만 그래?) 아무 도구가 필요없는 재즈댄스를 할 때도 무슨 옷을 입을 건지는 아주 중요한 이슈였다. 솔직히 이건 강사 선생님도 인정했다. 옷이 이뻐야 거울에 비친 내 모습도 멋있어보이고 더 자신감 있게 할 수 있다고. 개똥철학 같지만 스포츠센터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땀이 나면 검게 물드는 회색 츄리닝을 입고 운동하는 것보다 단돈 만원짜리라도 쇄골이 보이는 티셔츠를 입는 게 훨씬 운동할 맛 나는건 사실이다. 왜 룰루레몬, 뮬라, 젝시믹스 같은 브랜드가 성공했겠는가. 예쁜 운동복은 운동을 열심히, 꾸준히, 기분 좋게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승마에도 당연히 필요한 옷과 장비가 있다. 첫날은 일단 청바지와 운동화면 된다는 지령을 받고 누가봐도 오늘 처음 말타는 사람처럼 소박하게 입고 갔다. 장갑도 꼭 필요한 것인데, 골프장갑이면 된다고 했지만 우리집엔 골프장갑조차 없기 때문에 쿠팡에서 저렴이 승마장갑을 하나 샀다. 그밖에 필요한 헬멧, 보호조끼, 그리고 종아리를 감싸는 챕스(chaps)는 승마장에서 빌려쓸 수 있었다.
얼마간 나의 승마패션은 계속 그 상태였다. 청바지와 운동화, 그리고 승마장에서 공짜로 대여해주는 장비들. 이미 수강료만으로도 거금이었기 때문에 옷이든 뭐든 승마용품을 산다는건 아직 초짜인 나에겐 좀 사치처럼 느껴졌지만, 나도 내 개인장비를 사고 싶긴 했다. 승마장에 가면 아이들이나 초보자 레벨이신 분들도 바지와 부츠 정도는 다 갖추고 있었고, 어떤 분은 나보다 덜 자주 승마장에 오는 것 같은데 헬멧이며 부츠, 그리고 그것들을 담는 전용 백팩까지 갖고 있으셨다. 도대체 왜 빌려쓸 수 있는데 (선수할 것도 아니면서) 내 장비가 갖고 싶은 걸까. 요즘 헬스에 미쳐 있는 후배가 자꾸 운동용품이 쌓여간다고 고백하면서 나보고는 승마장비도 사야되는 거냐, 그거 다 승마장에서 대여해주는거 아니냐길래 뭔가 너 자식은 해답을 알고 있나 싶어서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대여 안 하냐."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냥 재즈댄스 선생님의 철학을 계속 신봉하기로 했다. 역시 운동은 장비빨이다.
승마장비는 다른 스포츠(예를 들어 중년 스포츠의 대명사 골프)에 비해 파는 곳도 적고 선택지도 많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살 수 있는 곳이 아예 없는건 아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면 직구를 하는 사람들의 후기도 종종 보였다. 그런데 나는 몇달 후면 파리를 갈 것이었다. 파리가 어떤 곳인가. 승마라면 영국과 종주국 자존심을 다투는 프랑스의 수도 아닌가. 직구가 아니라 정말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장비를 살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는 있었다. 출국까지 3달 정도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 장비 욕심 내지 않고 말만 열심히 타자고 다짐했다.
그러다 바지만이라도 먼저 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든 때가 있었다. 어느날부터 말을 타고 나면 무릎 안쪽에 자꾸 상처가 났던 것이다. 청바지라 함은 튼튼하고 질긴 광부들의 작업복으로 시작한 역사적인 패션 아닌가. 그런 청바지를 뚫고 몸에 상처를 내다니 승마바지는 참으로 꼭 필요한 아이템이로군, 이라고 생각했지만 파리에서의 쇼핑 찬스는 다시 한번 이성이 나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싸도 5만원은 하는 승마바지를 사는 대신 나는 청바지 안에 레깅스를 받쳐 입는 것으로 뽐뿌를 간신히 잠재웠다.
평소에 청바지 입을 일이 별로 없는 나는 청바지도 단 한벌 뿐이어서 주구장창 그 바지만 입고 말을 타러 갔다. 가을이 저물고 찐 승마인들만 말을 탄다는 겨울이 돼도 나의 의상은 변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승마장 감독님이 한마디 하셨다.
"내 바지라도 줄까?"
"아... 사실 제가 좀 있으면 파리를 가거든요... 가서 왕창 사올거에요.."
나의 수줍은 고백에 그제서야 감독님과 교관님들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승마장에 말 타러 오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겨울철에도 매 주말 아침마다 꼬박꼬박 오면서, 어떤 날은 2시간씩도 타면서, 이제 실력도 꽤 늘었는데 부츠는 커녕 바지도 사지 않는건 약간 의문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역시나 하나의 명제로 수렴한다.
운동은 장비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