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다녀온 파리여행은 준비과정부터 아주 설렜다. 물론 모든 여행은 즐겁고 설레지만 이번 여행은 그간과 조금 달랐다. 2년 만에 대한민국 국경을 넘어 해외로 나가는 것인데다 그만큼 의지와 상관없이 모아진(?) 여윳돈이 많았다. 신경써야 할 동행도 없었다. '나'만 생각하면 된다는 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날개라도 단 기분이었다. 사촌동생이 같이 가도 되냐고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자 나는 바로 철벽을 쳤다.
오미크론이 등장하면서 백신접종자도 해외에서 들어오면 자가격리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행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는 현실부정인지 대책없는 낙관인지 예정대로 여행을 밀어부쳤다. 재택근무하게 해달라고 해야지 뭐. 이렇게 충실한 일꾼인 나를 고작 일주일 자가격리 때문에 자를리가 없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오미크론이 열심히 종족 번식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묵묵히, 또 화려하게 파리여행 스케쥴을 라인업해가고 있었다.
우선 호텔부터 거의 역대급으로 사치를 부렸다. 그래봤자 같은 가격의 우리나라 호텔방에 비하면 1/4도 안될 것 같은 크기지만, 이 작은 방에서 자가격리를 한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매일 아침 프랑스의 맛있는 바게트와 크로아상에 버터를 발라 카페 알롱줴와 함께 마실 생각을 하니 알지도 못하는 샹송을 콧노래로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괜히 애플뮤직에서 '프랑스 샹송 대표곡'을 골라 틀어놓기도 했다.
비행기표를 끊은 뒤 나는 오페라극장 스케쥴부터 확인했다. 오 세상에. 마침 <피가로의 결혼>이 딱 내가 파리에 있는 동안 공연될 예정이었다. 이건 파리에서 오페라를 보라는 신의 계시였다. 그런데 티켓 오픈 날짜를 놓치는 바람에 정신차리고 예매 페이지에 들어갔을 땐 이미 모든 좌석이 매진이었다ㅠ 뭐야.. 파리 사람들 이렇게나 오페라를 좋아해? 하는 수 없이 대기를 걸어놓고 반쯤 포기한채 (그런것 치고는 상당히 자주) 파리오페라 홈페이지를 들락날락거렸는데, 어느날 거짓말처럼 좌석이 한 자리 나와 있었다! 그것도 가장 높은 클래스의 좌석으로. 또 신의 계시가 내려온 것이었다. 오페라 그냥 보지 말고 제일 좋은 좌석에서 보라고. 나는 한 0.1초 정도 고민을 한 후 결제 버튼을 눌렀다.
0.1초의 고민을 한 이유는 오페라 예매에 실패하고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현대 발레 공연을 예약해놓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남짓한 여행기간 동안 공연을 2개씩이나 보는건 좀 뭐랄까, 내가 작정하고 돈을 쓰기로 했어도(?)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벌인 일들에 비하면 이건 사치 축에도 못 끼는 거였지만. 어쨌든 겨울이라 밖에 돌아다니기도 귀찮을테니 파리에 있는 동안 한시적 공연 마니아가 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혼자 여행이 이래서 좋다. 그냥 하고 싶으면,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오면, 하면 되는 거다. 누구한테 의견을 묻거나 동의를 구할 필요 없이.
그리고 이번 파리여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정, '승마장비 사기'. 구글 지도에서 그냥 'horseriding equipment'라고 검색했더니 금새 여러 좌표가 떴다. 예상보다 많은 검색 결과가 나와서 약간 당황했다. 승마장비란게 이렇게 길가다 갑자기 '오 여기 안장이 괜찮은데?' 하면서 들어가서 사들고 나오는 그런 것이었던가.
파리에는 승마장비 매장 체인이 있었다. 심지어 여기서는 말 간식도 판매한다. 말이 한평생 살면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미식(?)은 각설탕일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먹는 것에 진심인 나라 프랑스답다. '우리 말이 이거 잘 먹어요~ 최고에요!' '말이 안 먹네요.. 돈 아까워요(별점테러)' 따위의 리뷰가 달려 있었다. '말'을 '아기'나 '강아지'로 바꿔서 읽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말 간식도 파는 곳이니 역시 파리에서 승마장비를 산다는 나의 계획은 완벽하다고 자화자찬하며, 매장 사이트에 심심하면 한번씩 들어가 바지는 무슨 색으로 살까, 부츠는 어떤 스타일로 살까, 위시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렇게 이제나저제나 단벌 청바지와 운동화 패션에서 벗어나 누가봐도 '말 좀 타는' 패션으로 거듭나게 될 날을 기다렸다.
"오늘은 실내로 갈거에요."
승마를 시작한지 두달쯤 지난 어느 날, 감격의 레벨업 순간이 왔다. 드디어 '실내'에 입성한 것이다. 여기서 '실내'라고 하는건 '실내마장'의 줄인말이다. 보통 처음 말을 타면 '원형마장'이라는 곳에서 시작하는데, 길따라 나즈막한 울타리가 쳐져 있기 때문에 말들이 딴 곳으로 새지 않고(?) 정해진 길로만 움직인다. 그래서 기승자는 말이 어디로 튈지 걱정하지 않고 본인의 자세 교정에만 신경쓸 수 있다. 반면 실내마장은 30미터*70미터 정도 크기의 그냥 뻥 뚫린 운동장이다. 능력자 분들은 여기서 원이나 곡선을 그리며 자유자재로 말을 타신다. 반면 생초보인 나는 실내에 처음 나간 날 말이 갈 곳을 잃어서 마장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원형마장에 있는 높이 30센치 울타리의 존재감이 그렇게나 클줄은 몰랐다.
사실 나는 너무 초보라 파리에서 승마장비를 살 생각은 해도, 말을 타는건 무리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승마를 시작한지 이제 겨우 한두달밖에 안된 주제에 파리에서도 말을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건 내가 '외승'이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이후부터 시작된 망상이었다. 외승. 승마의 꽃이라 불리는 외승. 말그대로 승마장 밖에 나가서 타는 것이 외승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을! 울창한 숲이나 그림 같은 해변을 말과 함께 달린다. 내 최애 만화인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오스칼님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달리듯이!
생각만해도 짜릿했지만 내가 다니는 승마장의 외승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조건이 있었다. '고삐 연결 가능 회원'이어야 한다는 것. 고삐연결? 이게 무슨 소리지. 말한테 고삐를 매어줄줄 알아야 된다는 말인가? (*고삐연결은 말과 기승자가 고삐를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기승자가 고삐로 보내는 신호에 말이 집중하고 잘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고삐연결은 사실 말로 백날 설명해봤자 이해가 잘안된다.) 고삐연결은 둘째치고 말을 움직이게도 못하는데 외승은 아직 나에게 요원한 꿈이었다.
망부석처럼 서 있었던 실내진출 첫날의 기억을 뒤로 하고 오늘은 제발 몇 걸음이라도 가보자는 소박한 바람을 앉고 다시 말에 올랐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따라 말이 내 말을 너무 잘 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리로 가자고 하면 가고, 저리로 가자고 하면 갔다. 뭐지 이거. 갑자기 나한테 말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생긴건가. 자신감이 폭발한 나는 그날부터 가슴이 웅장해지는 계획을 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외승을 가자!'
이렇게해서 찾아본 파리의 외승코스는 정말 말도 안됐다. 말이 안되게 너무 좋았다. 베르사이유 궁전. 생클루성. 여기가 다 파리에서 말을 탈 수 있는 곳들이다. 원형마장이니 실내마장이니 그런게 아니라 외승으로. 진짜 오스칼님처럼 베르사이유 궁전을 말타고 달릴 수 있는 거였다. 헬맷을 써야하니 머리카락을 휘날리지는 못하겠지만. 금액이 만만찮았으나 내가 또 언제 파리에서 승마를 할 수 있겠냐는 단순 명제가 모든 결정을 일사천리로 내리게 했다. 예약금 결제가 인터넷으로 잘 안되자 나는 또 바로 은행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팔자에도 없던 해외송금을 다 해봤다. 승마에 미친 나의 추진력은 무서웠다.
오페라 가르니에의 발레 공연은 리세일(re-sale)을 신청했다. 지금 공연을 두개씩이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는 표를 마음대로 쉽게 취소할 수 없고 재판매가 돼야 그 금액만큼 환불을 받는 식이었다. 이게 과연 팔릴까. 그래도 오프닝 타임의 제일 좋은 좌석을 조금 DC해서 내놓았으니 누구라도 제발 걸려주세요, 아니 사주세요 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안 팔리면 할 수 없고. 파리에서 일주일동안 승마도 하고 오페라도 보고 발레도 보고 인생 마지막이란 듯이 놀다 오는 거지 뭐. 돈은 다시 벌면 된다.
'디어 마담. 너의 재판매 신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마인드가 통한건지(?) 파리오페라에서 광고메일만 주구장창 오다가 어느날 거짓말처럼 리세일을 성공했다는 메일이 왔다. 다시 한번 신의 계시가 내려온 것 같았다.
공연은 그냥 하나만 보고 말이나 실컷 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