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첫 기승이세요? 완전 처음?"
어딘지 날카로워보이는 인상의 교관님은 걸음마부터 가르쳐야한다는 생각에 답답함이 엄습하신 것 같았다. 그래서 첫날부터 괜히 위축되긴 했지만 몇달 겪어보니 이분은 원래 말투가 그러신 것 뿐이었다. 교관님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승마는 혼나면서 배우는 거였는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신명나게 혼나는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직은 선선한 가을날씨였던 10월 마지막주의 어느날, 처음으로 말을 타러 갔다. 제발 재밌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안고. 재즈댄스를 대신할 새로운 운동 취미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각종 부업(?)이 늘어나면서 쉴 시간은 줄고 쓸 돈만 많아지자 자꾸 비싼 술과 음식으로 탕진하게 됐기 때문에 뭐든지간에 어떤 돌파구가 있어야 했다. 먹고 마시는 원초적인 즐거움 말고, 복잡한 머리를 정돈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승마장에 도착했을 때, 몇 마리의 말들이 수장대(*말에 안장 등등을 얹고 기승준비를 하는 곳)에 얌전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수장대 기둥에 체인이 연결돼있고 이 체인이 말 입 양쪽에 (정확히는 말이 물고 있는 재갈이 연결된 굴레에) 각각 한줄씩 걸려 있었다. 그것 말고 이 말들을 제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말들은 미동도 없이 얌전히, 정말 얌전-히 서 있었다. 저 상태가 편한 걸까,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님 그냥 포기한걸까.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는 잠시 좀 혼자 있으라고 어디 묶어놓기라도 하면 세상 억울한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었는데. 게다가 말은 몸무게가 나보다 10배는 되는 동물이다. 얘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를 뒷발로 후려치고 도망갈 수도 있지 않을까. 저렇게 순종적이니 수천년동안 인간이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었던 거구나 싶어,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 잘 기억하셔야 돼요. 이게 고삐, 이게 안장, 이게 등자라는 거에요."
기억 못하면 회초리라도 맞을 것 같은 분위기에 '괜히 왔나?'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1회 강습료 8만8천원을 지불했으니 당당해져 보기로 했다. 고삐와 안장은 많이 들어본 거라 괜찮은데 등자는 왜이렇게 입에 안 붙는지 자꾸만 까먹었다. '등자'라는 단어를 이루는 3개의 자음과 2개의 모음 중에 다 빼먹고 'ㅈ'만 자꾸 입술 끝에 맴돌았다. 지금은 (등자 세게 밟는다고) 하도 많이 혼나서 절대 잊어먹지 않는 단어가 됐지만. 등자는 쉽게 말하면 '발걸이'인데, 말을 탄 사람이 발을 걸도록 안장에 달려 있는 장치다. 이게 없으면 말에 오르는 일도, 말 위에서 균형을 잡고 리듬을 타는 일도 매우 불편한 정도를 넘어, '등자 없이 말을 타는게 가능해?'란 생각이 들만큼 힘들기 때문에 초보자들은 이 작은 등자에 온몸과 마음을 의지한다. 그래서 '등자를 세게 밟는' 것은 말을 처음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다(그리고 그밖에도 수 없이 많은 실수를 한다).
여기서 '말을 탄다'함은 다들 어린 시절 한번쯤 경험해봤을, 동물원에서 사육사 아저씨가 줄을 잡고 있고 온갖 안전장비로 무장한 말 위에 가만히 얹혀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안장(이라기보다 의자에 가까운 형태의 무언가)에는 튼튼한 손잡이까지 달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 승마할 때는 당연히 그런 손잡이 따위 없다. 줄을 잡아주는 사람도 없다. 믿을건 내가 타고 있는 이 말과, 나의 튼실한 허벅지뿐이었다.
다른 승마용어들은 친숙한 것이 많았다. 말이 입에 물고 있는 것은 재갈이다. 이 재갈이 고삐와 연결이 되고 사람은 고삐 잡는 힘을 통해서 말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말에게 '가자!'는 신호를 주기 위해 옆구리를 차는 행위 혹은 그 행위의 효과를 높이려 신발 뒤축에 끼우는 장치를 박차라고 한다. '박차를 가하다'할 때 그 박차다. 어릴 때 동화책에서 백마탄 왕자님이 신은 부츠 뒷꿈치에 톱니바퀴 모양의 무언가가 달려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저게 뭘까, 말 옆구리에 찔리면 되게 아프겠다, 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알고보니 바로 그게 박차였다. 당연히 그런 날카로운 박차는 숙련된 기수만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왜 우리는 (승마를 하지 않는 사람도) 승마용어를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그만큼 사람이 말과 함께 한 세월이 길다는 뜻일 거다.
아주 예전에 고삐는 손잡이가 아니고 사람은 말 위에서 그냥 허벅지 힘으로 중심을 잡고 앉아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헐 그게 가능해? 라고 생각했었는데, 승마를 해보니 말의 등은 생각보다 안정적이고 또 따뜻했다. 겨울에 한참 신나게 말을 타고 내리면 그 온기가 사라져서 더 춥게 느껴질 정도였다.
교관님이 말은 허리가 약한 동물이라고, 1억짜리 쇼파에 앉는다 생각하라고 하셨다. 아니, 허리가 약한 동물인데 이렇게 사람을 태워도 되는건가. 책상에 (나쁜 자세로)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 종종 허리가 아픈 나는 말에게 한껏 감정이입이 되기 시작했다. 승마를 조금이라도 배워본 사람들은 아는 내용인데, 말을 탈 때는 '반동'을 잘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말의 움직임에 따라 사람도 같이 일어났다 앉았다를 해줘야 말 허리에 부담이 덜 간다. 그런데 1억짜리 허리가 약한 동물이라고 하니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앉아야 하는 타이밍에 거의 앉는둥 마는둥하며 말 위에서 서서 달리는 서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또 제대로 앉지 않는다고 혼이 났다.
"1억짜리 쇼파라고 하셔서..."
"지금 거의 10억짜리 쇼파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1억이에요 1억."
1억이든 10억이든ㅠㅠ 이렇게 허리를 혹사당해도 자신의 등을 기꺼이 내어주며 체온까지 나눠주는 말들은 정말이지 덩치값 못하게 착하기 그지 없는 순둥이들이었다. 난 그렇게 한 시간만에 말과 사랑에 빠지고 바로 6개월짜리 회원권을 결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