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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Mar 18. 2022

나의 첫 해외여행이 남긴 것


"승마는 어디에 좋아요?"


내가 승마를 시작했다고 하니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승마가 왜 그렇게 좋아요?" 혹은 "승마가 그렇게 재밌어요?" 이렇게 물었다면 신이 나서 술술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승마가 '어디에' 좋은지는 딱히 생각해보거나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내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겠지만 이들이 원하는 정보는 그런게 아닐테니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냥 이론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을 읊었다. 유연성을 기르는데 좋고요, 균형감각도 생겨요. 말은 힘으로 타는게 아니거든요.


말해놓고보니 뭔가 아쉬웠다. 승마가 내 삶에 미치고 있는 지대한 영향을 생각하면 유연성이니, 균형감각이니, 그런건 사소한 보너스에 불과했다. 식습관, 생활패턴, 가치관, 장래희망(?)까지 예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지난 몇달간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내 인생은 승마를 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난 그래서 승마를 시작한 2021년 10월을 '세컨드 임팩트'라 부르기로 했다.




'퍼스트 임팩트'는 25년 전 일어났다. 1997년 여름, 중학생 꼬꼬마였던 나는 부모님을 따라 베트남행 비행기를 탔다. 그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그즈음 아버지는 회사의 해외사무소를 열기 위해 몇 개월째 베트남에 머물고 계셨고, 겨울이면 온 가족이 베트남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었다. 그 전에 앞서 살 집도 구고 겸사겸사 맛보기(?) 여행을 간 것이다. 앞으로 몇 년을 살게 될지 모를 낯선 나라로.


어릴땐 국내선에서 주는 오렌지주스 한잔이 그렇게 맛있어서 그거 얻어마시려고 잠도 안자고 기다리곤 했었다. 그냥 마트에서 파는 기성제품이었을텐데 무료로 게다가 한잔한잔 정성스럽게 따라주는 그 음료수는 나에겐 비행기 여행의 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외국으로, 국경을 넘어, 오렌지주스 정도가 아니라 밥까지 주는(!!) 국제선을 난생 처음 탔으니 그 설렘은 오죽했을까 싶지만 사실 난 매우 시무룩한 상태였다. 베트남을 가야한다는 건, 게다가 거기서 살아야 한다는 건 중학생 꼬꼬마에게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베트남? 거기 아직 전쟁 중인거 아닌가?? 미국, 유럽, 캐나다 뭐 이런 멋있는 나라들도 많잖아. 왜 하필 베트남인데ㅠ


호치민 공항을 나와 처음 맞아 본 동남아시아의 후텁지근한 공기는 불쾌했다.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진 늦은 밤이었다. 어둑어둑한 차장 밖 풍경은 한적하고 또 평범했던 것 같다. 시내로 들어가자 뭔가 내가 알던 도시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간판에 보이는 문자들은 분명 알파벳이었지만 낯선 배열에 이상한 기호가 잔뜩 붙어 있었고, 거리는 허름하고 또 지저분했다. 그러던 중에 어디선가 오토바이 한 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한 대. 또 한 대.


"여기 오토바이가 되게 많네."


베트남에 온 첫 소감을 이야기하자 아버지가 대답했다.


"내일 아침되면 더 놀랄걸."




진짜였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식당에 밥을 먹으러 내려간 나는 두번 연달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일단은 창문에 태연하게 붙어 있는 도마뱀 때문에 한번 놀랐고, 그 다음은 창문 밖에 펼쳐진,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의 행렬 때문에 또 한번 놀랐다. 이럴거면 차선은 왜 그려놨나 싶을 정도로 오토바이들은 무질서하게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름 그들만의 룰이 있는건지 신기하게도 서로 부딪치지 않고 잘도 지나다니는 것이었다. 그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길을 건너는 사람들도,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오토바이의 물결을 헤치며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도, 모두가 이 혼돈의 교통 생태계에서 미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일단 전쟁 중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한 후부터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신기했다. 거리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폭이 좁고 깊이가 긴 특이한 구조였는데,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영향이라고 했다. 더운 날씨 탓인지 천장은 매우 높았고 모든 천장에는 실링팬이 달려 있었다. 실링팬을 달기 위해서 천장이 높은 건지 천장이 높은 김에 실링팬도 달기 시작한건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보통의 한국 아파트에선 분명 불가능한 구조였다. 생전 처음 보는 열대과일들은 요상한 생김새에 맛은 또 너무 달았으나 그게 왠지 더 도전의식(?)을 자극했다. 엄마는 한국 과일만 못하다고 불평하셨지만 난 한국에 없는 과일을 먹어볼 수 있다는 게 더 신났었다.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맛은 닝닝한 선인장 열매, 속이 빨갛지 않고 노란 수박, 똥냄새가 나는 과일의 여왕 듀리안 등등. 내가 사는 도시, 내가 익숙한 문화, 그게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다.


어린 아이의 적응력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난 빠른 속도로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오토바이들이 떼로 몰려 오는 대로를 건너는 일도 식은 죽 먹기였고 창문에 붙어 있는 도마뱀은 한두번 보고 나니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듯이 비가 쏟아져도 금방 그칠걸 알기에 태연해졌다. 길거리에서 대충 목욕탕 의자 비슷한 것을 놓고 쌀국수를 파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커다랗게 얼린 얼음을 아무렇게나 부수어 플라스틱 바스켓에 가득 담아 두었다가 커피보다 설탕이 더 많은 것 같은 아이스커피에 잔뜩 넣어주는 카페에 가는 것을 즐겼다.


나는 베트남이 좋아졌다. 이곳에서 살게  집과 내가 다니게  학교가 기대됐다. 외국 문화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고 문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어쩌면 매우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도   있을  같다,  생각을 넘어 이런걸 공부하고 싶다고 마음 먹게 됐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됐을때 나는 '인류학' 전공하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님은 내가 순순히 의대나 법대를 가지 않고 인류학이란 듣보 전공을 하겠다고 하니 기가 차셨겠지만, 탓을 하려면 아버지를 그때 베트남으로 보낸 그 회사를 탓해야 할 것이었다.




우리 가족의 베트남 이주 계획은 IMF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모두 없던 것이 됐다. 아버지가 몇달동안 고생하신 일들은 물거품이 돼버렸고, 나는 학교도 가지 못한채 아침마다 스쿨버스를 보며 부러워하는 나날을 보내다 한국의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아쉬움도 잠시, 놀라운 적응력의 10대 답게 나는 금새 한국에서의 일상을 이어나갔지만 베트남을 가기 전과 후의 나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내가 승마를 해보자고 생각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첫 기승예약을 하고, 몇달 후 가게 된 프랑스 파리여행 중에도 말을 타기로 계획한 것은 베트남에서 경험한 '퍼스트 임팩트'의 나비효과였는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또 나에게 즐거운 변화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을 즐기게 된 것 같다. 이번 '세컨드 임팩트'는 어디까지 나를 변화시킬까.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기꺼이 수십만원의 기승료를 결제한다.


25년쯤 후 언젠가 다시 올 '서드 임팩트'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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