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참 혹독한 한 해였다. 졸업만 하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져 있을줄 알았는데 취업의 관문은 더 좁아져 있었고, 기회가 닿아 입사하게 된 직장에서는 최악의 상사 원투쓰리를 만나며 내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져 갔다. 상사 원은 세상에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못한 듯한 안하무인이었고, 상사 투는 꼰대도 그런 꼰대가 없었다. 본인이 꼰대란걸 모르는 게 더 최악이었다. 상사 쓰리는 모든 잡일을 나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타이틀만 챙겨갔다. 특별히 나만 운이 나빠서 이런 진상들을 만난건 아니란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9월부터는 개판 5분 전인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나는 또 영혼에 각인된 성실함으로 야근과 주말근무를 마다 않고 이 개판을 수습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됐을 것 같은데, 내가 맡은건 무조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쓸데없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여름휴가도, 추석명절도 반납한 채 달린 덕분에 당당하게 일주일 휴가를 내고 뉴욕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으니, 2019년이 꼭 잔인하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포상휴가의 목적지로 뉴욕을 선택하는 데는 오랜 고민이 필요 없었다. 수년 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뉴욕이었다. 10년 전쯤, 친구와 뉴욕여행을 가기로 해놓고 나는 차마 회사 눈치가 보여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충성심이었다.
뉴욕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재즈바에 가서 공연보기, 일몰 때 전망대에 올라가 뉴욕 풍경보기, 오이스터바 가보기, 그리고 버거킹에 가서 임파서블 와퍼 먹어보기. 임파서블 와퍼는 식물성 패티로 만든 와퍼로, 2019년 당시 미국 전역에서 판매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건강'과는 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을 것 같은 패스트푸드계에서 동물성 고기를 뺀 햄버거를 출시한다니, 그걸 누가 사먹을까 싶었다. 햄버거라 함은 건강을 포기하는 대신 자극적인 맛의 쾌락을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정크푸드의 대표주자 아닌가. 그런 햄버거가 채식을 컨셉으로 상품을 출시한 것이다. '임파서블'이란 이름이 그나마 정크푸드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다고 해야할까.
그때까지만 해도 대체육이란건 우주식량 비슷하게 평범한 사람들은 아직 먹을 일이 없는, 유별난 채식주의자들이나 일부러 찾아 먹는 낯선 음식이었다. 이렇게 길가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음식점, 게다가 패스트푸드점에서 패스트하게 사먹을 음식이 아니었던 거다. 우리보다 더 정크한 음식을 좋아하는 미국 사람들이 굳이 대체육으로 만들어진 햄버거를 사먹을까? 감자튀김과 콜라를 마음 편하게 먹기 위해서 햄버거라도 임파서블하게 먹으려고 하는걸까? 아무튼 이 새로운 와퍼에 대한 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즈음 나는 대체육에 대한 관심이 아주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축산업이 환경오염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전까지 채식이니, 대체육이니 하는 것들은 동물의 생명윤리나 혹은 건강상의 문제로 선택하는 옵션 정도로만 여기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고기를 못 먹거나 안 먹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무적의 신체와, 동물복지의 열악한 실태를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육식의 기쁨을 포기하지 못하는 나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구인으로서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환경오염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조금 진지해졌다.
나는 기후위기, 환경오염이란 전 인류의 과오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는 게 없었다. 환경운동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하는건 나보다 돈도 많고 시간도 많으신 분들이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일회용품 안 쓰기나 자동차 안 타기도 이미 그 편리함에 길들여져 버린 나에겐 너무 힘든 퀘스트였다. 내가 그나마 지구환경을 위해서 내 의지로 실천하고 있는건 탄소 발자국(*사람의 활동이나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온실가스의 양)이 길기로 유명한 (어차피 비싸기도 하고 후숙시키는 것도 귀찮은) 아보카도를 안 먹기로 한 것 정도랄까.
그렇다. 무언가를 먹지 않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축산업이 환경오염의 주범 중 하나이고 대체육이란 괜찮은 차선책이 나왔다는 사실은 내가 지구에게 지고 있는 이 엄청난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려면 이 대체육이란 것을 먹어봐야 했다. 아직 당장에 고기를 끊지는 못하더라도 얼마나 대체육으로 '대체'가 될 수 있을지 판단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대체육을 사먹을 방법이 마땅찮았다. 짜파게티 안에 들은 고기가 콩고기라고 하던데, 내가 궁금한건 강렬한 소스 안에서 존재감을 애써 감추고 있는 가루 부스러기 같은 대체육이 아니었다. 햄버거의 패티정도 되는, 요리의 주인공으로서 대체육이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뉴욕에 가게 된 김에 신문물을 경험해보고 오자며, 대체육의 신사유람단이 된 마음으로 태평양을 건너갔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하루종일 열심히 돌아다니고 나니 몸이 으슬으슬해져, 임파서블 와퍼를 사러 가는 길에 한 수프 가게를 들렀다.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은데 혹시 수프를 파는 곳이 근처에 있을까 구글지도에 검색을 했더니 반갑게도 바로 옆 골목에 'Hale & Hearty'라는 체인점이 있었다. 가게 이름의 뜻은 '건강하고 따뜻한.' 이름만 봐도 속이 뜨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 쌀쌀하고 낯선 도시에서 약간 지친 나의 영혼을 달래줄 닭고기 수프와, 환경오염 방관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를 임파서블 와퍼를 사러 나섰다.
수프 가게 내부는 여느 카페처럼 익숙한 구조였다. 나는 메뉴판을 살폈다. 치킨수프가 단연 종류가 많았다. 다 처음 보는 메뉴이니 제일 익숙한 이름의 '치킨 팟파이'를 골랐다. 그밖에도 메뉴판에는 V, GF, DF 따위의 깨알같은 암호(?)가 잔뜩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V는 예상하듯이 Vegetarian(채식주의)을 위한 메뉴다. 그리고 GF는 Gluten Free(글루텐프리), DF는 Dairy Free(데어리프리)라고 설명이 돼있었다. 글루텐프리는 알겠는데 데어리프리는 또 뭐람? 그리고 미쿡 사람들 생각보다 입맛도 까다롭고 건강도 무지하게 챙기네? 라고 생각하는 사이 나의 치킨 팟파이가 곱게 포장되어 나왔다.
이제 임파서블 버거를 사러 갈 생각에 '데어리프리'의 미스테리는 금세 나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곧 그 데어리프리가 나의 미각을 충격으로 마비시키게 될 것이란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버거킹에 들어서니 이제 막 출시된 신상품 답게 온 메뉴판과 광고판을 독점하고 있는 임파서블 와퍼의 휘황찬란한 이름이 보였다. 나는 카운터로 가 당당하게 주문했다.
"임파서블 와퍼 플리즈."
"두 유 원ㅌ 치즈?"
종업원의 예상밖 리액션이 돌아왔다. 치즈 넣을거냐고? 당연하지. 뭘 그런걸 물어.. 라고 생각하던 찰나, 엄격한 채식주의자(비건)들은 유제품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세상에. 대체육으로 만든 햄버거에 치즈도 넣지 않고 먹는다고? 대체 건강과 환경에 얼마나 진심이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걸까, 경외감이 들기 시작했다. 버거킹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콰트로치즈와퍼인 나에겐 아직 '임파서블'한 경지였다.
그렇게 임파서블 와퍼 세트와 치킨 팟파이 수프를 야무지게 챙겨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엘레베이터에서 만난 어느 할아버지가 "거 냄새 좋다"며 부러워하셨다. 뿌듯한 마음으로 이 미국식 건강 한상차림을 셋팅하고 드디어, 대체육 햄버거를 한입 먹어보았다.
그 맛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