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오름 오르기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기획하셨던 분이 <영남 알프스 9봉 오르기>를 기획하였다. 지역상생과 지역 홍보,방문객들의 건강활동 유도...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하루에 산을 3개씩 올라도 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대단하신 분의 발상인지 어처구니가 없다.
그것도 무려 1,000m 이상의 高峰인데 말이다.
제 아무리 마루금(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능선길)으로 연결된 봉우리라고 할지라도 1일 3산을 인증한 사람이 무슨 시간이 있고 체력이 남아서 영남알프스 근처에서 돈을 쓸 것이며 지역경제를 살릴 것인가. 심장마비나 탈진으로 죽는 사람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과욕을 부린 개인 탓으로 만 돌릴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좌우지간 울주군의 <영남알프스 9봉 오르기> 탓에 고헌산과 더불어 문복산도 폭탄을 맞았다.특히, 정상까지최단거리(왕복 4km)인 '대현 3리(중리) 복지회관' 방향은 고헌산의 외항재 못지않은 주차전쟁이 벌어지고, 상수원 계곡에서 땀을 씻는 등산객들로 인해 주민들과 마찰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나마 상수원 계곡 루트를 강제 폐쇄하여 수원 오염은 다소 해결된 듯 보이지만, 좁은 도로와 마을 입구에는 여전히 주차 전쟁 중이다.
대현3리 마을 입구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1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문복산이 산불통제구역에 들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기간을 제외한 7개월 동안(여름인 7~9월을 빼면 겨우 5개월)의 주말에 최소 1만 5천 명 이상의 등산객들이 특정 들머리에 집중된다. 고성방가, 쓰레기 투기, 진입로 무단주차, 마을 내 무단주차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지만 동네 상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속된 말로 부처님도 돌아 앉으실 판이다.정작 이들이 내는 세금이 기념품 제작에 사용되고 있으니 주민들이 토로 해내는 목소리는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시골인심이 각박해졌다"라고 탓할 일만은 결코 아니다.
첫 단추부터 신중했어야 한다. 제주도의 오름 오르기는 광활하게 분산된 대자연과 방문객의 적절한 수요가 잘 이루어졌지만, 영남알프스 9봉은 어느 곳이든 지역 주민들의 생활터전과 이어져 있고, 영남알프스의 거의 모든 길이 대대로 지역주민들의 삶의 길에서 유래되었던 연유이다.
지역 전문가들과 지역에 관한 밀접한 논의를 바탕으로 기획되었더라면 지금처럼 산,주민,등산객,야생동물 모두가 죽어나가는 현실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된 코스를 골라서 경치를 감상하며 올라가도 힘든 등산인데, 최단거리만을 선택해 그저 정상만 찍는 이벤트가 지역 홍보와 경제에는 또 얼마나 이바지할 것인가.
사실, 문복산은 여름에 즐거운 산이다.
경주와 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문복산은 두 시·군에서 오르는 산길이 다양하게 열려 있으나, 주요 들머리는 운문령과 대현 3리 복지회관, 청도 삼계리 계곡길이다.
그중, 청도 삼계리에서 계곡을 즐기며 오르는 산길에서는 원광법사가 화랑들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전했다는 <가슬갑사터>를 만날 수 있으며 계살피계곡, 수리덤계곡의 원시림을 즐길 수 있다.
계살피계곡의 이모저모
"영남알프스 9봉 죽이기"만 없었다면, 비인기산이었던 문복산은 무더운 여름날 등산을 마치고 울창한 숲 속, 호젓한 계곡이나 폭포수 아래에 앉아서 땀을 식히기에 더할 나위가 없는 곳이었다. 산도 살고, 주민과 등산객도 살고, 야생동물들도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화랑도가 심신을 수련하였을 만큼 심산유곡이란 것이 그 반증이다.
문복! 인생무상을 깨닫다.
보름간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대야성의 성주인 "품석"은 서라벌의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어떡하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이미 화살도 떨어지고, 내부 배신자의 배신으로 인해 가지고 있던 군량도 모두 불탔다. 귀족이라는 걸 앞세워 아무런 방비 없이 흥청망청 놀아났던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너무 늦은 후회였다. 무엇보다 성주를 믿지 않는 성민들의 이반된 민심과 저하된 사기야말로 자신이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이었다.
자신도 살고 성민도 살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항복이었다. 하지만, 백제의 장군 "윤충"은 김춘추의 딸 "고타소(金古陀炤)"와사위인 "품석"을 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품석은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결을 했고, 그와 아내의 시신은 목이 잘려 감옥 땅바닥에 묻히는 수모를 당했다.
품석의 친구이자 화랑이었던 "문복"은 이 소식을 듣고 눈에 불이 일었다. 그 후로 문복은 백제와의 전쟁에는 더욱 미친 듯이 참여했다. 문복은 김유신 장군이 지휘했던 옥문곡 전투에 참전했고, 이때 사로잡은 8명의 백제 장군들을 품석, 고타소의 유골과 교환할 수 있었다.
그 유골수습의 임무에 문복이 자원했는데, 감옥 바닥에 버려지다시피 매장된 품석과 고타소의 유골을 발견하고 크나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명문가의 혈통, 명문가의 사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목이 잘린 채 방치된 시신들은 아직도 썩지 못하고 땅바닥에 뒹굴어져 있었던 것이다.
서라벌로 돌아온 문복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그 처참한 모습의 친구를 생각하며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했던 그는, 서라벌에서 70리 떨어진 가슬갑사로의 출가를 결심했다. 화랑도 수련 시절에 큰 가르침을 얻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가슬갑사로 들어가 속세를 등지자 수많은 화랑들이 문복을 찾아왔다. 삼국 통일 전쟁의 선봉에 함께 나아가자는 취지였지만, 이미 인생무상을 깨달은 문복에게 땅의 경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계살피 계곡을 넘어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곳으로 몰래 숨어들어 화랑도가 아닌 또 다른 도(道), 마음의 수련을 시작했다. 아무도 그 뒤로 문복을 만났다고 하는 화랑은 없다. 다만, 그가 입산해서 사라진 산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산을 "문복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드리개바위(드린바위)
드리개 바위
여기저기 수행처를 찾아다니던 문복은 정상 아래의 큰 바위를 마주 했다. 그것은 뭔가 덕지덕지 붙어 두둑한 모양새였다. 문득 품석과 고타소의 결혼식 때 모습이 생각났다. 앳된 십 대 소녀인 고타소의 양쪽 귀에는 커다란 귀걸이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목걸이와 허리띠의 금제 장식들이 유난히 빛나 보였던 것은 금제 드리개 때문이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바위도 딱 그때 그 드리개의 모습처럼 두둑했다.
덕지덕지 장식이 두툼한 여러가지 드리개
경주 대현 3리에서 오르는 산길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계곡으로의 출입이 금지되긴 했지만, 대신 문복산의 상징인 "드리개 바위(드린 바위, 코끼리바위)"코스가 가히 일품이다. 드리개 바위는 높이가 130m이며 너비가 100m에 이르는 돌출된 암봉(巖峰)이다. 울산대학교 산악회가 여러 가지 루트의 암벽 루트를 개척해 놓았는데, 영남 지역에서 단일 자연암장으로는 제일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날카로운 암봉 길이기는 하지만, 일반 등산객들도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짜릿한 스릴을 즐기며 문복산의 공룡능선을 맛볼 수 있다.
단거리 코스를 찾았다면 드리개 바위를 충분히 보았을 것이니 올여름은 계살피 계곡과 수리덤 계곡의 심연으로 빠져 보길 추천드린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여름에도 춥다는 걸 기억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