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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Mar 16. 2022

영남알프스  노매드 (신불산)

짭쪼름한 신불산

신불산 (佛山 해발 1,159m)


도산검수 [刀山劍水]

도산검수! 칼을 심어 놓은 것 같은 산(山), 검을 숨겨 놓은 수(水)라는 뜻이니, 몹시 험악하고 위험한 산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영남알프스 산군 중, 그 어느 산에 들더라도 도산검수의 날카로움을 숨기지 않은 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신불산은  "십이 도산검수"라 할 만큼 다양한 난코스를 품은 산이다. 그러하기에 어느 신불산 예찬론자께서는 "가지산은 싱겁고, 간월산은 간간하며, 신불산은 짭쪼리 하다"라고 평가했다. 멋진 비경도 숨기고 있고, 또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코스가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게다.


절대 잊지 못할
짭쪼름

영남알프스 산악문화센터를 깃점으로 간월재를 통해서 오르는 길이 비교적 쉽다 보니, 근래 부쩍 인기가 많기는 하다. 초급의 난이도와 간월재라는 좋은 경치가 볼 만은 하지만, 바위 능선이나 삼봉 능선, 그 외에 빨치산 루트 같은 신불산이 숨긴 폐쇄 등산로들을 더듬다가 조난의 고비를 체험했던 아찔한 순간들은, 여전히 등줄기에 솜털이 곤두설 만큼 결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칼바위 코스 암릉. 2020년 이래 안전난간 공사가 잘 이루어져 있다.


身不! 나를 잊는 산

고려 말 이곳에서 '辛旽(신돈)'이 수행을 하다가 부처의 혜안을 얻었다 하여 神佛(신불) 산이라 불렀다고 전해지며, 산신령도 계시고 부처님도 계시다고 하여 신불산이라고 불렀다고도 한 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단조성을 기준으로 부를 때는 동봉(東峰, 영축산)과 대비해 서봉(西峰)이라 불리기도 다.  또한 가천리 방향에서 보기에 턱없이 높게 우뚝 서 있었으니 "왕봉(王峰)"이라 불리기도 다. 중간 휴식지인 간월재의 또 다른 명칭이 "왕봉현(王峰峴)이니, 신불산으로 불리는 '왕봉'을 오르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던 고개라는 뜻인데,  지금도 간월재 대피소 뒤편에서 파래소 계곡으로 흘러 들어가는 계곡은 여전히 지역 주민들에게는 간월골이 아닌 '왕방골'로 불리고 있다.

소수 의견으로 고대어  "신ᄫᅳᆯ(신벌, 신의 들판)"이 신불산으로 표기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언양 평지에서 올려보기에 잔뜩 먹구름을 이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으니, 우리 조상님들이 보기에 이곳은 어쩌면 한반도의 올림포스산이었을 수도 있다.


글쎄...

어느 것이 맞는지를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까. 뭐라 이름하든 산은 거기에 있어 왔던 것을.

돌아보는 경치가 아름다워서,

혹은 숨은 난코스에 한숨이 나와서...

이럭이든 저럭이든, 세간에 회자되는 이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주변 지역 사람들의 끝없는 동경과 숭배의 대상이자, 삶의 토대였다는 증명이다.


도산검수의 난코스에
홀로 동떨어진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비로소 신불산을 깨닫는다.


한 목숨 줄을 부여잡으려, 한 걸음 한 손짓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을 잊어 물아일체가 되니 그제서야 비로소 진정한 신불(身不) 경지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신불산 정상의 단조탑


상처 가득한 신불산

신불산은 눈물의 산이다. 신불범이 가천마을과 방기마을, 명촌마을, 천전마을 일대를 휘젓던 시절에는 나뭇꾼들이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산이었다. 그러기에 신불은 경외의 산이었으며 개인만 슬픈 것이 아니라, 더해서 민족의 역사가 슬픈 산이기도 하다.

정상에는 단조탑이라고 명명된 큼직한 돌탑이 서 있다. 태풍 매미가 덮쳤을 땐 무너지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길에 다시 세워지기도 하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영남알프스 9봉 인증을 위해서 오르시든, 100대 명산 인증을 위해 오르시든 간에 누구라도 이탑을 마주 하시면 잠시나마 묵념 한 번이라도 부탁드린다.

임진왜란 때 파죽지세의 왜군을 무려 삼일 밤낮을 막아섰던 단조 산성의 파괴된 성돌로 만들어진 탑이기 때문이다. 단조탑은 성을 함락한 뒤, 마지막 한 마리의 가축까지 도륙할 정도로 잔인했던 왜적들에 당당히 맞섰던 용기의 상징이자, 아무 지원도 없는 고립무원의 산성에서 내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던 간절함의 상징이다.


8만 평 억새밭이 드넓은 신불재는 또 어떠한가.

일본 제국주의는 홍류폭포 입구에 산판을 설치하고 수많은 금강송을 베어 갔다. 보리밥 한 그릇을 얻기 위해 우리 할아버지들은 짚신짝을 신고 산을 올라야만 했다. 그래야 겨우 연명할 수 있는 수탈의 시절이었다. 그렇게 범이  쫒겨 가고, 나무가 잘려 나간 자리에 화전민들은 불을 놓아 산나물을 채취했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와중에는 숨어든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미군들이 여기저기 능선을 따라 폭격을 해댔다. 폭탄이 휩쓸고 간 자리에 억새가 자라고, 지금은 그곳이 명소가 되어 사람들이 마냥 웃고 즐기고 있으니 이 또한 실로 무개념의 슬픔이 아니겠는가.


속절없는 예단으로 오해는 마시라.

웃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잊지 말자는 것이다.

신불재에서 바라 본 신불산 정상
아! 어즈버 태평 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인증샷 이벤트 전의 휴일 정상(2017)
인증샷 대기 줄(2021)


남은 이야기들

태글바위에 새겨진 인간에 대한 예의

신불산 빨치산과 태봉산

봉 능선 신불범

1500년을  숨어 산 신불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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