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시탐구

공주의 남자-박찬호 기념관

공주시에서 만난 평범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

by 바람개비

한국야구계 불세출의 영웅 박찬호, 그의 고향인 '충남 공주시'에는 <박찬호 기념관>이 있다. 솔직히 필자는 북쪽의 우상화나 신격화를 비난하며 자란 세대이기 때문에 생가이든, 공원이든, 혹은 다큐멘터리나 서적이든 간에 살아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모종의 행위들을 크게 마땅찮아하는 부류이다. 그래서 <박찬호 기념관>을 방문하게 된 것은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기도 했다.

공주와 부여, 익산을 묶어서 백제 고도(古都) 여행을 계획했는지라 그 첫 시작을 웅진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고대에 멸망한 왕조이지만 어디를 가든 국가의 수도가 있었던 곳은 알 수 없는 묘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마치 서울 강남의 신도시가 아무리 화려하게 발전해도 원도심인 북촌이나 정동이 가진 내공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 정했던 코스들과 무령왕릉을 돌아보고 나서 다음 일정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남았는지라, 원래 계획에는 없던 <박찬호 기념관>을 방문해 보게 되었다. 지금은 꽤나 발전한 듯 보이기는 하지만, 위치상으로 도시 중심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이 있는 전형적인 도시 빈촌의 느낌이 묻어나는 변두리 동네였다.

입구에는 소띠인 박찬호 선수를 상징하는 큰 소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코로나 19로 체험관 같은 일부 시설이 여전히 휴관이지만 입구의 안내원 분들이 친절하게 맞이해 주신다. 직접 해설을 해주시겠다고 하시지만 조용히 오랫동안 들러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애써 친절을 사양하니, 굳이 각 전시관마다 놓여있는 주요 기념품들과 자료들에 대한 사전 지식을 알려주신다. 직업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진 분이라는 게 느껴진다.


선수 시절의 화려한 유니폼, 상패들, 야구 용품들, 여러 사진들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만, 그중에서 유난히 필장의 눈길을 끄는 두, 세 가지의 물건들이 있다.

첫째는 다저스 시절 그가 쓰던 야구모자이다. 야구 모자 안쪽에 학창 시절 필자가 그랬듯이 결의를 다지는 글이 쓰여 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당당하게 가자


당당한 모습으로 와닿기보다는, 오히려 동양의 이름 없는 야구선수에게 가해졌을 차별과 무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나아가기는 힘들고, 돌아오는 결정을 할 수는 더더욱 어려운 시절이었을 테니 말이다. 누구는 시련이 닥치면 주저앉아 자신을 버린 신을 탓하고, 또 누구는 견딜 만큼의 시련을 준 신에게 감사하며 홀연히 일어선다. 이 모자는 시련을 털고 우뚝 선 한 사내의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그의 인간적인 고뇌는 야구 글러브에도 잘 쓰여 있습니다.


CHP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정신 집중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고, 누구와 터놓고 상담조차 할 수 없었을 CHP(*찬호박)의 시간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멘털을 다 잡는 홀로서기뿐이었을 것이다.

특히 잦은 이적이 있던 시기였는지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자조 섞인 문구를 볼 때는 몇 번의 본의 아닌 이직을 겪은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울컥함이 몰려온다.

회사에서든 가정에서든, 또는 대부분의 모임에서든 늘 필자의 뜻과는 무관하게 칼잡이의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소심한 필자가 가끔 느끼는 기분들이 압축되어 있었다.

조용히 따라 읽어 본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대미를 장식한 감동은 그가 신었던 가장자리가 다 헤져서 떨어진 스파이크이다.

이 신발을 보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세상이 칭송하는 야구의 신도 아니었으며 운 좋게 메이저리그에 들어간 운빨의 선수도 아니었고, 선천적으로 야구에 특출 난 재주를 가진 영웅도 아니란 걸 깨달았다.

겨우 지름 18피트, 높이 10인치에 불과한 투수만의 공간,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 흙먼지만 날리는 그 좁고 낮은 마운드를 지켜내기 위해 그가 흘린 땀과 피는 얼마나 많았을지를 이 신발 한 켤레가 모두 다 이야기해 준다. 적과 마주 한 장수, 포수가 싸인을 보내지만 그 절체절명의 시간에 적의 방망이질을 막아 낼 수 있는 최종 결정은 오직 그의 결단이었다. 그가 한 최선의 노력 덕분에 스파이크는 흉터가 아닌 영광의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전시되어 있는 여러 장의 신분증들은,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들과 운명을 건 싸움들을 했을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여기저기 많이도 쫓겨 다니고, 팔려 다녔다.

하얀 캔버스에 그가 물감을 던져 완성한 '투타화'는, 그 자신이 한 판의 세상에 불꽃처럼 그려나갔던 수많은 혼돈의 결정들이고 포효였을 것이다.


매일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그 단순한 유혹에 야구가 뭔지도 모르고 야구를 선택했던 어린 소년. 순간순간 밀려드는 고독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등... 우리네처럼 있는 땅이 단단한지, 나아갈 땅이 길이 맞는지 평범한 고민을 했던 우리와 같은 보통의 남자, 박찬호.

그렇지만 그 모든 결정의 순간들에서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우뚝 서며 당당히 지구별에 이름 석 자를 남긴 특별한 남자, 영웅 박찬호.


여행의 신은, 의도치 않은 낯선 곳에 더 재미난 일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값진 시간이었다. 평범하지 않지만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의 땀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기록하는 기념관이라면, 그가 세상에 존재할 때 함께 존재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곳은 숭배의 자리가 아니라 예우의 지리이다. 다음 기회에 다시 오게 된다면 분명 이번에 보지 못한 또 다른 감동이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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