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시탐구

피난의 땅 - 충남 공주

웅진백제, 망국의 설움을 부흥의 기반으로 삼다.

by 바람개비

1. 공산성

475년 9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남하하여 백제의 한성을 공격한다. 북방의 광활한 유목지를 확장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남쪽의 비옥한 농토를 차지하는 것이 사시사철 고정적인 식량 확보를 위해서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맹렬한 남진을 통해, 비옥한 한강 변을 확보하고 있던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개로왕을 죽이게 된다.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갔던 개로왕의 동생 '문주'가 1만의 구원병과 함께 돌아왔을 때는 이미 수도는 불에 타서 폐허가 되고 왕이 전사한 뒤였다. 부랴부랴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모든 기반이 송두리째 폐허가 되어버린 데다가, 언제 또 고구려의 침공이 반복될지 모르는 혼란의 시간이었다. 결국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급히 남쪽으로의 천도를 결정하고 폐허가 된 수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금강을 낀 천혜의 요새 지역인 공산'에 왕성을 짓고 재기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금강 옆 공산성벽에 오르면 9월의 바람이 차다고 느껴진다. 예전에는 금강을 밝히는 불빛도 없었을 터인데, 성루에서 한성을 향한 북쪽 강안을 바라보면 얼마나 불안하고 슬펐을까. 초가을에도 옷깃을 여밀 정도의 강바람이 부는 걸 보면, 475년의 시월에 살아 도망쳐야 했던 백제의 궁인들에게는 눈물이 나도록 추운 궁성이었을 것이다.

웅진백제의 궁궐, 공산성

한국사를 통틀어 산성에 왕궁이 자리 한 예가 없으니 얼마나 다급하고 불안했던 천도였는지 족히 짐작이 된다. 이곳은 또한 조선시대 이괄의 난을 당했던 인조가 잠시 도망치기도 하였던 곳이니, 어쩌면 도망치는 왕과 궁인들을 보호해 주는 피난처의 숙명을 가진 땅인지도 모르겠다.


2.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 왕

1971년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보수공사 중, 우연히 무령왕릉(7호분)이 발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다 털린 줄 알았던 백제 고분군에서 처녀분(墳)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시골마을 공주를 일약 '인싸'로 등극시켰다.

극성스러운 기자, 호기심 많은 주민, 재촉하는 정치인들에 밀린 발굴단이, 겨우 11시간 만에 4,000여 점의 유물을, 그야말로 "삽으로 쓸어 담는" 한국 고고학계의 치욕스러운 오점을 남겼지만, "사마왕"이라고 쓰인 묘지석이 발견되어 고대 동아시아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과 사망일이 확인된 무덤이 되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무령왕은 웅진시대의 백제를 반석에 올려놓았으며 훗날,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사비(부여)로 천도를 해 백제의 중흥을 구가할 수 있도록 앞선 기반을 다진 왕이다. 또한 2011년 아키히토 일본왕(125대)이 "간무 천황(50대)의 생모가 무령왕의 후손(10대 손, 고야 신립 태후)"이라고 고백하여 열도에 태풍급 혼란을 야기한 일도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 국보가 무려 12점이다. 심지어 왕비로 추정되는 30대로 추정되는 여인의 어금니도 발견이 되었다. 합장을 한 사실과 부장품으로 미루어 보건대 왕비로 추정은 되지만, 62세로 사망한 무령왕과의 나이차로 볼 때 제1왕비는 아니었을 것 같다.


무령왕은 무강왕이라고도 불리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동과 선화공주 전설을 논하는 대목에 "무왕이 무강왕이라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보면 동시대로 추정되는 6호 분의 주인이 제1왕비인 선화공주였을지도 모르겠다.
익산 미륵사지 사리봉영기에서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명문을 남겨두었으니, 무왕의 서동설화는 무령왕의 서동설화로 바꿔야 할 수도 있다.

어떤 고고학자께서 "고고학에서는 전설을 사실로 확인하는 것보다는, 서로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서 역사에의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던 생각이 난다. 다소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불확실의 시간들"이 역사에 관해서는 되레 재미난 시간들이 될 것 같다.
온전하게 발견된 묘지석으로 인해 1457년 전, 5월 7일이 무령왕이 사망한 정확한 날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만 문"의 돈으로 사방 각 지신들에게 땅을 사서 묻힌 왕, 어쩌면 이 무덤이 일제강점기에 발견되지 않고 후대에 와서 발견된 것은 거금을 들여 제대로 땅값을 지불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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