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시탐구

충남 부여, 사비 백제를 뒤덮은 향연(香煙)

화려해서 오히려 더 슬픈 백제

by 바람개비

부소산과 낙화암, 정림사지 등등 망국 백제의 애환이 담긴 땅이 부여이지만 사실, 내 부여 방문은 나름 중대한 목적이 있었다. 아침 9시 출입구의 걸쇠가 열리자마자 부여박물관에 뛰어들어가다시피 달려 들어갔다. 다른 모든 전시물보다 1993년 발견되었던 <백제 금동 대향로>의 실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부여 방문은 무조건 성공일 거라는 목표가 분명했다.

아주 예전 이곳에 대향로를 보러 왔을 때는 외부 전시 행사 중이라서 복제품을 본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었던 경험이 있었는지라, 행여 오늘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없던 것은 아니다. 박물관에 전화를 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 기계적인 사전 확인 작업은 찾아가는 동안의 설렘을 상쇄시켜 버릴 것이기에 추천하고 싶은 행위는 아니다. 인연이 되면 보고, 인연이 안되면 못 보는 그것이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가진 묘미이다.


대향로가 놓인 전시실의 장막을 걷고 들어 간 순간,

요즘 말을 빌리자면, 미쳤다!
'국보 중의 최고 국보'인 백제 금동 대향로의 진품


처음에는 찬연한 금빛이 시선을 압도했으며, 화려한 백제인의 솜씨가 담긴 용틀임과 봉황, 그리고 백제인의 이상 세계와 세계 최고의 크기라는 것에 숨을 죽여야 했고, 또한 밝혀진 바로는 유럽보다 2~300년을 앞서 수은과 금의 끓는점을 이용한 "아말감 도금 기법"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접목한 백제의 장인들에게 경외감마저 들었다.
먼 길을 왔으니 내처 한 시간은 곁에서 머무르며 상봉의 기쁨도 나눌 겸 샅샅이 살필 요량이었다. 편한 좌석만 있다면 폐관시간까지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는 상봉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에 빠져 정신이 없던 와중에 어찌 된 일인지 이내, 측면을 장식한 악사들의 구슬픈 연주가 들려왔다.


대향로가 발견된 곳은 공방의 불타 내려앉은 수조터 진흙 속이었다. 그 속에 1,35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숨겨져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숨겨진 날은 바로 백제 최후의 날이었다.

왕릉에 제사를 올리던 능사찰까지 쳐들어온 적군을 피해 향로를 안전하게 옮길 틈도 없이 진흙 가득한 웅덩이 속에 던져 넣어야만 했을 긴박한 상황... 온 능역은 죽음을 직전급하의 죽음을 맞닥뜨린 단말마의 비명으로 가득하며, 적들은 창칼로 여기저기 사찰의 문을 두드려대었을 것이다. 약탈과 살인을 마친 적도들은, 이내 능사찰과 부속 건물들에 불을 질러 700년을 이어 온 고대국가 백제가 멸망하였음을 능산리 묘역의 왕들에게 확인시켰을 것이다.
여기까지 만이라면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었으련만, 백제 최후의 날 당나라로 끌려간 포로가 무려 12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필시 이 대향로를 숨긴 사제가 공방에서 칼을 맞거나 불에 타 죽지 않았다면, 최소한 머나먼 당나라 땅으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한스런 생을 마감했을 것 같다.


박물관을 들어갈 때에만 해도 옆에서 한 시간을 꼬박 채우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대향로는 꽃향이 아닌 망국백성들의 살이 타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며, 놀란 동물들은 이리저리 뛰며 능산리를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현악사들의 구슬픈 음악이 귓전을 맴돌고, 향로는 나당연합군이 지른 불길이 타올랐다. 왕의 실정이든 귀족들의 부패이든 망국의 향연이 전시실에 가득해졌다. 이내 밀려드는 먹먹한 설움과 한스러움이 복받쳐 사진 하나 남기고 서둘러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백제 최고의 공예품을 접하였건만, 오히려 내게 백제는 더 이상 화려한 문화강국도 아니고,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도 아니다. 백제는 그저 오랜 한이고 슬픔 가득한 망국의 역사였다. 공산성에서 느꼈던 그 차디 찬 겨울바람의 살에임보다 이 화려한 금동대향로가 더 슬프고 더 아린다. 되레 너무 빛나서 눈물이 에이고, 너무 화려해서 먹먹해진다.

슬픈 백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승용차로 3분 거리의 정림사지에서는 더 안타까움과 분노가 치밀었다. 알려진 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인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재료가 목재에서 돌로 넘어가는 초기 형태를 잘 보여주며 누 천 년의 세월을 잘 견뎌 오고 있다.
한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라는 작자가 이 돌탑에 "대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까지 와서 백제를 정벌하였다"라는 낙서를 새겨 놓았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소정방의 무덤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죽어서도 그곳을 지나게 된다면 반드시 그놈의 무덤을 밟고 서서 오줌 한 번 시원하게 갈겨 주고 지나리라 다짐한다.


뭇사람들의 말처럼 부여는 역시 낙화암이고 삼천궁녀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 시대에 만들어진 가십거리라고 할지라도, 부여를 갔으니 고란사와 낙화암을 어찌 안 들릴 수 있었겠는가. 부소 산성 길을 올라 낙화암을 오르는 것이 지당하겠으나 왜놈들이 만들었던 부여 신궁터를 지나기 싫어 구드레 나루에서 황포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제깟 놈들이 감히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고자 이곳 부소산 자락에 부여 신궁을 세우려 했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일본왕이 무령대왕의 핏줄이라고 고백하였으나, 감히 미개한 열도의 화족 따위가 고대 문화강국 백제에 정통성을 이으려 하다니 이 어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놀랍게도 유람선의 스피커를 통해, 정사(正史)도 아닌 삼천 궁녀의 이야기가 아직도 버젓이 전설이라고 소개되고 있고, 심지어 여인의 정절을 교훈으로 삼고 찬양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가 우리 시대에 전설 아닌 전설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마도 멸망한 왕조에 대한 측은지심이 만들어 낸 공감의 힘이었을진대 여인의 정절을 운운하다니.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천년 고찰 고란사의 약수터는 요즘 시대의 화합물 분석으로는 식수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고 하였으나, 여전히 의자왕이 즐겨 마시던 그 청아한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위장에 다소의 면역력을 가진 분들은 꼭 마셔 볼 일이다.
수학여행 때나 예전 여행 때 맛보았던 수 십 년 전과 변함없는 그 맛이었으니, 예전에 이 물을 마셔 본 경험자라면 비록 화학적으로 부적합한 식수이겠으나 아마도 그 물맛이 그대로일 것이니 미리 실망은 하지 마시라.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으니, 낙석 방지를 위해 설치한 구조물들로 인해 가뜩이나 희귀했던 고란초가 근래 이, 삼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고란사도 그간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인지 천 년을 지나 온 고찰이라고 보기엔 왠지 낯선 느낌이었다. 오히려 사십 년 전에 이곳을 왔을 때는 고찰다운 품격이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말이다.


한 계단, 한 계단 부소산의 낙화암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나당연합군이 짓밟고 일제가 망가뜨린 땅, 그리고 이제는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못난 후손들이 고증도 없이 망치고 있는 땅.

650년을 이어 왔던 백제가 역사에서 사라지던 그 마지막 날 소정방이 했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백제의 고도 부여에 자본이라는 무기를 들이대어 난도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놀라운 것은 사십 년 전처럼, 이십 년 전처럼 기억 속의 그곳에 그 모습 그대로 자리 잡고 있는 <백화정>이었다. 부여를 떠올리면 낙화암이고, 꼭 그 기억의 한 장을 헤집고 나오던 딱 그 장면 그대로 말이다.

삼천이든 삼십이든 적의 창칼을 피해 이곳 낭떠러지까지 도망치다가, 끝내는 백마강 퍼런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은 망국의 백성들이 흘린 피눈물이라 백마강은 더 슬퍼 보이나 보다.

오늘 만난 백제는 화려해서
오히려 더 슬퍼 보이던 백제였습니다.
여러분이 만났던 부여는,
여러분이 올랐던 낙화암은 어떤 백제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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