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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Aug 05. 2023

골목 비너스

단편소설(연재물 습작) <골목 대장(臺帳)* 중,  1편>

저무는 태양 탓에 산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시간이다. 하루 종일 판잣집 골목을 맹렬하게 달구던 태양도 이제는 지친 듯 서산 자락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 시선의 끝단, 작은 구름 덩어리가 떠있는 곳은 점점 잘 여문 살구빛 노을로 물들어가고, 오후 내내 새파랗던 하늘은 차츰차츰 신비로운 보라색 색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면 서산으로 해가 떨어질 것이고, 해든 달이든 발광체라고는 없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하늘의 발광체가 없으니 하루 중에 가장 어두운 시간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낮도 밤도 아닌 그 시간을 늑대의 시간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마법의 시간이라고 했다. 하지만 짙은 어둠이 세상을 덮을 때까지는 노을빛이 구름에 반사되어 세상을 살구빛으로 물들일 것이다. 그 어느 때 못지않게 밝겠지만 그림자는 옅어져 없어지고, 따가운 태양 빛이 없어져 눈이 부시지도 않을 것이니 분명 마법의 시간이다.


"철컹, 쾅!"

"다녀왔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이제 막 집에 돌아오는 소년은 무엇이 급한지 육중한 철대문을 뜯어버릴 기세로 열어 젖힌다.


"아이고 깜짝이야. 이 녀석이 살살 좀 다니라니까. 그리고 대길이 엄마도 와 계신데 인사 먼저 드려야지."

"어! 오셨어요."

"그래, 진택이 오는 거 보니까 우리 대길이도 학교 마치고 올 시간이겠네. 대길이랑 같이 왔니?"

"아뇨,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뛰어 왔어요."


소년은 대길엄마의 물음에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툇마루에 가방을 던지다시피 하고는 옥상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택아! 또 옥상 가니? 땀범벅인데 목욕부터 하지 그러니. 엄마가 씻겨 줄게 , 어서 우물로 가자."

"아이고, 성님은 아직 진택이 목욕시켜 주는가 봐요. 우리 대길이는 등이라도 밀어주려 했더니 두어 해 전부터 화를 내며 근처에도 못 오게 하던데. 진택이는 아직 어린 건가, 아니면 엄마를 너무 좋아하는 건가..."

"조막만 한 것들이 씻겨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화를 왜 내누?"

"아이고, 성님도 참... 중학생이면 이제 영락없는 사내 새끼 들이우. 하는 짓이 영락없는 지 애비 닮았다니까요."


소년은 엄마의 기를 들은 둥 마는 둥 조금의 관심도 없다. 대길이 엄마와 마주 앉아 바느질을 하던 소년의 엄마가 계단을 오르고 있는 소년의 발걸음을 잡았으나, 벌써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절반 이상 뛰어 오른 상태다.


"알았어요. 엄마. 해지기 전에 얼른 노을만 보고 내려와서 할게요."


소년이 올라 선 옥상에는 마법의 시간이 펼쳐 질지, 혹은 늑대의 시간이 펼쳐 질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하늘이 선사해주는 ""일 것이다. 하늘을 보는 것은 우산 장수와 예술가뿐이라 하였는데, 까까머리 앳된 소년은 겨우 중학생이다.

이제 갓 감성이 싹트는 사춘기가 시작된 듯도 한 나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소년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소년이 좋아한 것은 햇빛이 쨍하게 내리쬐는 날, 나무 그늘이 드리우는  교정의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는 것이었다.

풍성하게 가지를 뻗은 플라타너스의 손바닥만 한 나뭇잎들과 솜털이 뽀송뽀송한 방울열매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너울거리며 빈 틈을 보여 줄 때마다, 틈새를 비집고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은 소년의 얼굴에 따사로운 햇살을 비추었다. 나뭇잎이 만들어 주는 그늘과 그 틈을 비집고 내리쬐는 태양의 따갑게까지 느껴지는 빛 내림의 온기는, 언제나 소년의 기분을 들뜨게 하며 호기심으로 퉁퉁거리는 작은 심장을 트라이 앵글의 타격음이 울려 나가듯 잔잔하게 가라앉혔다. 햇살과 그늘이 바람의 리듬을 따라 교차할 때면 손이 닿지 않는 나뭇잎들이 소년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진택이는 또 저 짓거리하네. 야! 진택아, 우리 집에 하숙하는 대학생 형이 그러던데 해를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다가는 눈깔 버리고 봉사된다고 하더라."

"내 눈은 괜찮거든. 내가 뭐 하고 있는지 너희 같이 애송이들이 내 마음을 알리가 없지. 어쨌든 눈이 봉사가 된다 해도 내 얼굴은 햇빛을 느낄 수 있을 거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웃기고 있네. 우리가 애송이면 너는 대학생이라도 되냐. 그런데 도대체 맨날 뭔데, 시체처럼 누워 있는 게 그렇게 재미있냐?"


호기심 있는 몇몇 친구들이 소년을 따라 '해 바라보기' 놀이에 동참해 보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소년만큼 오래도록 정면으로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을 견뎌 낼 수 없었다. 그나마 생각이 있는 일단의 친구들은 해를 바라보는 것을 즐기는 소년의 시력이 손상될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기도 했지만, 넘실대는 나뭇잎 사이를 뚫고 직사로 내리쬐는 태양의 따사로움을 온 얼굴로 느끼고, 그 빛 내림 속에서 하늘의 신과 얘기하고 싶은 소년의 숨은 마음까지 이해해 주는 친구는 없었다. 하긴 기껏해야 열 살을 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그런 감성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저 소년의 감성이 또래에 비해 조금 더 특별했던 것이다.

다소의 세월이 흘러 중학생이 되었지만, 그 유별났던 소년의 감성이 사라지기보단 오히려 더 진화하고 있다. 옥상의 계단을 막 올라서는 순간, 소년의 뺨은 새빨간 빛으로 물들고 열기가 느껴진다. 서산 마루금과 수평을 만들어 낸 태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석영의 불덩이가 되어 여기저기 떠있는 구름들을 붉은 살구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도 그 불덩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여드름이 자리잡지 않은 매끈한 소년의 얼굴 전체가 마치 폭발직전인 마그마처럼 농염한 붉은빛으로 물든다. 파랗던 하늘에 노을이 퍼져 가며 점차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그에 맞춰 서서히 붉게 익어가는 구름들을 보며 소년은 시나브로 혼잣말을 한다.


"와! 끝내 주네. 오늘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을까."


중학생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독백이라고 보기는 다소 어려운 어휘이지만, 노을을 보기 위해 매일 하늘을 쳐다보는 소년의 정서를 감안하면 그리 놀랍거나 애어른 취급을 하며 조롱거리로 삼을 탄식은 아니다.

더군다나, 노을을 배웅하는 것은 소년에게 있어 아주 오래된 혼자만의 의식이기도 하다. 소나기가 내린 날이면 노을과 무지개를 함께 보게 되는 행운도 있었고, 하늘 높이 떠서 날아가는 비행기에 노을빛이 붉게 물들라 치면, 마치 외계행성의 ufo를 조우하는 것 마냥 소년의 상상력을 들뜨게 했다. 골목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볼 수도 있는 옥상은 신세계를 만날 수 있는 요지경이고, 혼자 세상을 관망할 수 있는 외딴 성의 전망대이기도 하다.

겨우 1층 판잣집의 옥상에 서있을 뿐이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본 판잣집 레트 지붕들이 잠시 칙칙한 시멘트색을 내려놓은 채 짙은 살구빛으로 채색을 하는 시간도 이 즈음이고, 온통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위태롭고 생기 없던 판자촌 골목이 생기 감도는 선홍빛 수혈을 받는 시간도 노을이 소년의 을 점령한 이 시간이다. 이 시간만큼은 판자촌의 동네 사람들 모두가 노을빛이 가져다준 생기를 받아 활력이 넘쳐 보인다.


서산으로 해가 넘어 갈듯 말듯한 그 시각이면, 동사무소의 스피커에서는 국기하강식을 위해 어김없이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세상은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 그 잠시의 경건한 시간 동안, 소년은 동네의 파수꾼이 된다. 저 멀리 리어카를 끌고 언덕을 오르다 멈춰 선 고물상 강씨 아저씨도 보이고, 미장원 앞을 청소하다 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미자 아줌마도 보인다. 국기하강식을 위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지금, 불경스레 움직이는 누군가 있다면  분명 간첩이거나 불순분자이니 눈여겨봐두어야 한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며칠 전에는, 애국가가 울려 나오는데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려는 아랫골목 김씨 아저씨의 택시를 친구들과 막아 세웠던 적도 있다.


"끼익"

"이놈의 새끼들이 미쳤냐! 죽을라고 환장했니? 어디 차 앞에 뛰어들어오는 거야."


소년들이 차 앞으로 뛰어든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택시기사 김씨는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김씨가 차에서 내려 소년들을 때리기라도 할 기세로 윽박질렀지만 소년들은 누구도 꿈쩍하지 않았다.


"김기사 아저씨! 지금 애국가 소리 안 들리세요? 우리 담임선생님이 애국가 나올 때 움직이면 간첩이라 했습니다. 아저씨는 왜 안 서는데요? 지금 택시 움직일 거면  파출소에 신고해버릴 겁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달리는 택시 앞에 몸을 던진 이유가 무모한 애국심이라는 것을 손톱만치도 짐작할 수 없었다. 느닷없이 꼬마들이 차 앞에 뛰어들어 화가 단단히 난 김기사였지만, 선생님의 훈시를 들이대며 간첩이 아니냐고 묻는 당돌함에 더 이상 소년들을 질책하지 못한다.  애국가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은 계면쩍음 일수도 있고, 소년들의 당돌함이 귀엽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야! 이놈아들아, 미안하다. 그래도 아저씨는 베트콩들하고 전쟁도 하고 왔다. 내 절대 간첩 아니다."


민족 동란의 시간과 타국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희생한 전쟁의 상흔이 채 지워지지 않는 시대이다. 그렇기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잠시 동안, 온 동네는 잠시 정지된 사진의 한 장면처럼 멈춰 섰다.

그때였다.


"주르륵주르륵"


애국가가 멈춰 세운 정지된 판자촌에 흡족해하며 소년이 파수꾼의 눈길을 거두려는 순간, 어디선가 물을 쏟아붓는 소리가 들린다. 소년이 살고 있는 동네는 여기저기 집집마다 우물이 있는 동네라 채소를 씻기도 하고, 빨래를 하기도 한다. 간혹 처음 보는 농기구나 낡은 기계들을 씻는 이웃들도 있기에 물소리 자체가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나, 운이 좋으면 생전 처음 보는 기계나 기구 같은 어떤 것이든 보게 되는 행운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애국가가 울리고 있는데 불경스럽게 물소리를 내다니 결코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짐짓 호기심이 발동한 소년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다음 달 반상회에서 단단히 야단치라고 엄마에게 이를 참이다. 그런데 물소리가 난 뒷집 마당을 내려다보는 순간, 소년은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아찔한 충격을 받는다. 자칫했으면 옥상에서 떨어질 만큼의 충격이었다.


우물가에는 뒷집에 사는 경아 엄마가 혼자 있다. 경아는 소년을 보면 "오빠야, 오빠야" 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네 댓살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 여자아이다. 그래서 경아 엄마는 소년의 집에 가끔 경아를 돌봐달라고 맡긴 적도 있고, 소년에게 과자를 한 봉지씩 안겨 줄 때도 많았다. 소년이 경아 엄마와 단둘이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소년의 엄마와 경아 엄마는 앞뒷집 사이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구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은 골목집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경아네 집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자주 흘러나와, 소년은 경아엄마가 아주 세련된 여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소년이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경아가 아직 초등학교도 가지 않았으니 경아 엄마의 나이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경아 엄마는 동네에서 꽤나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경아 엄마는 종종 밤이면 짙은 화장을 하고 어디론가 길을 나선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경아 엄마가 술집 여자가 아니냐며 수군거리곤 했다. 어깨를 덮는 긴 파마머리에 머리카락 색깔마저 노랗게 물들였으니 누군가는 양공주가 아니겠냐며 흘깃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아 아빠가 말쑥한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양공주라는 동네 아줌마들의 추측은 단순한 시샘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엔가는 골목 끄트머리 정자나무 평상에서 장기를 두던 박씨 아저씨와 고씨 아저씨가 아줌마들에게 야단을 맞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이 인간들이 미쳤나? 지금 어딜 쳐다보고 있는 거야."


왜 그런지 소년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골목을 걸어 나가는 경아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담배가게 박씨 아저씨와 철물점 고씨 아저씨는 아줌마들에게 큰소리로 욕을 먹고 뒤통수를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아... 왜 그래. 우리가 뭘 본다고 그래......"


술이라도 한 잔 걸치는 날이면 종종 아줌마들에게 고함도 치고 손찌검도 하는 아저씨들이다. 그런데, 그 시간만큼은 정말로 아저씨들이 미친 것인지 뒤통수를 쥐어 터졌는데도 서로를 쳐다보며 베실베실 웃기만 했다. 어쨌거나 동네에서 그런 다양한 시선을 받고 있는 경아 엄마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몸에 끼얹고 있는 것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처음이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소년은 갑자기 명치 주위를 누군가  움켜쥐듯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며 자신의 호흡이 가빠짐을 느꼈다. 일부러 이런 장면을 보려고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경아 엄마의 완전한 나신을 보는 순간 입 속을 적시며 고여 있던 침은 순식간에 목구멍을 통해 넘어가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꿀꺽하며 침을 삼키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숨어서 보고 있는 자신이 경아 엄마에게 들켜 버린 것은 아닌지 당황스럽다. 들키면 난감한 사항이 벌어지련만, 소년의 시선이 경아엄마의 나신을 본 순간 생겨난 뜨거운 호기심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바가지에 길러진 우물물이 훑으며 지나간 경아 엄마의 나신은 농염한 노을빛에 반사되어 세상의 그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문득 학교 미술 시간에 배웠던 '비너스의 탄생'이 떠오른다. 사실 소년은 미술 선생님이 '비너스의 탄생'을 보여 줄 때 약간 심드렁했었다.


"얘들아! 조개껍데기에서 태어나는 이 여자가 바로 미의 여신 비너스다. 너희들한테는 벌거벗은 여자를 그린 누드그림이라서 야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인지 포르노인지 묘한 경계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이란 걸 하도록 하는 그게 진짜 예술이라는 증거다."

"선생님! 서양사람들은 뚱뚱한 여자를 좋아합니까? 배도 우리 아버지 배 같이 불룩하고, 팔이랑 허벅지도 통통한 게 영 이상합니다."


진택이의 엉뚱한 질문에 교실은 이내 웃음바다가 되었다. 조개껍데기 위에 서서 긴 머리카락으로 음부를 가리고 한 손으로 유방을 가린 다소 뚱뚱한 여자를 미의 여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소년은 쉽사리 동조할 수 없었다. 그랬었는데 지금 완벽히 현실에 나타 난 비너스를 만난 것이다. 노란 머리와 약간 볼록한 배, 그리고 살짝 통통한 팔과 허벅지. 게다가 노을이 반사되어 생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황금빛의 살결들. 비록 음부에는 검은색 체모가 다소 어색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 온전한 모습 그대로, 보티첼리가 그리고자 했던 비너스의 모습이다.


'이렇게 쳐다보다가 들키면 어떡하지...... 에잇 그렇지만 여성의 벗은 몸을 지켜보는 것이 어찌 죄이겠는가. 그게 죄라면 모든 인류는 죄의 근원에서 태어난 모순이 있는 것을.'


순순한 소년의 호기심  가득 찬 확신은 이내 그릇된 관음의 신념으로 변한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경아 엄마가 알리 없다는 아전인수의 확신이 생기자 소년은 경아 엄마를 머릿속에 천천히 그려 넣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결심이 서자 이내 소년의 눈길이 경아 엄마를 탐닉하기 시작한다. 예술성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긴 했으나, 소년의 눈길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끈적함으로 가득 찬다.


굵은 웨이브를 그리며 촉촉이 젖은 노란색 파마머리, 흰자와 검은 눈동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큰 눈과 노을빛이 반사되어 광채를 띈 광대뼈, 그리고 우물을 긷기 위해 바가지를 던져 넣는 통통한 팔과 그때마다 둥글게 그려지는 척추선. 무엇보다 상체에 비해 비대칭으로까지 느껴지는 통통한 둔부와 허벅지 라인. 게다가 이제 막 새물을 끼얹은 골목 비너스의 나신은 온통 노을빛을 반사하며 광채를 발산하고 있다.

소년이 정한 그림의 제목은 <골목 비너스>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낯선 서양인의 모습이라 요크셔 분홍돼지를 연상하게 하였는데, 경아 엄마는 완벽하게 예술적 누드를 갖춘 진정한 비너스라는 생각이 든다. 제 아무리 성능이 좋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놓는다 한들, 지금 노을빛으로 물들어 눈앞에 나타난 완벽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포집할 수 있을까.

둥근 어깨 선과 완만하게 패인 가슴골, 연분홍빛 두 점이 봉긋하게 자리 잡고 있는 유방은 굳이 만져 볼 필요조차도 없이 부드러움을 과시하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복부를 지탱하는 두 줄의 세로 근육선 사이로 깊게 파인 배꼽선이 잠시 눈을 희롱하는 듯하더니, 이내 음부를 가린 검은 숲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시선이 흐른다. 풋내기 예술가의 끈적해진 시선은 비너스의 굴곡진 허벅지와 복숭아 뼈 아래를 훑고, 다시 붉은 매니큐어가 그려진 발가락 끝을 마디마디 살핀 뒤, 볼록한 종아리 근육을 타고 여체의 위로 향한다. 이미 시선과 호흡의 거친 놀림을 스스로 멈추기에는 어려운 지경이다. 다소 뜨거워진 호흡으로 비대칭의 풍성한 둔부를 쓰다듬은 후 S자의 매끈한 척추선을 타고 뜨거운 눈빛은 점점 위로 올라온다. 소년의 시선은 잠시 지구의 중력을 벗어 나 이리저리 움직인다. 지금 딛고 서 있는 곳은 분명 지구이지만, 소년의 눈동자와 심장은 지구의 중력을 완벽히 떨쳐 버리고 있다.   

소년이 혼미한 그림을 그리는 중에 목욕을 마친 비너스는 어느새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 내는 중이다. 움켜 쥔 두 손이 움켜 쥔 하얀 수건의 휘둘림을 이기지 못한 물기들이 빠져나가자, 이제 막 세속의 때를 씻어 낸  노란 머리칼의 올들은 노을빛을 받아 더욱 진한 황금색으로 보풀보풀 나부낀다.

머릿속에 골목 비너스를 거의 아로 새길 즈음, 소년은 몸의 아랫부분에서  이상하게 아릿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근래 들어 부쩍 팬티가 미어질 듯 부풀어 오르는 묘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자주 있지만, 오늘은 눈으로 시작된 훈김으로 비롯되어 뭉툭한 끝이 뜨거워지고, 자신도 모르게 팬티가 부분 부분 축축해지는 것이 도무지 아랫도리의 무쌍한 변화를 제어할 수가 없다.


'아, 이런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처음 느껴보는 묘한 기운이 다소 당황스럽다. 붉은 노을빛이 점차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회색 늑대의 시간이 시작되자, 소년의 심장으로 엉큼함에 대한 죄책감이 꾸역꾸역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미 귀밑은 조금 전의 석양보다 더 붉고 뜨겁다. 심장은 캐틀드럼 마냥 퉁퉁거리고, 팬티 속의 깊은 그곳까지 심장의 퉁김이 느껴진다. 더 이상 비너스를 목도하며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마치 소년의 훔쳐보기를 온 세상에 밝혀야만 비로소 제대로 어둠이 올 것 같다. 사타구니가 뻐근하고 육중해진 느낌이다. 소년은 큰 죄를 지은 냥, 황급히 계단을 내려간다.


"님! 진택이 내려오네요. 저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어? 진택아 바지 주머니가 왜 그렇 툭 튀어나왔니?"


대길이 엄마는 마치 소년의 관능을 다 알기라도 한 것처럼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바라본다.

소년의 엄마는 아직 진택이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택아! 어서 옷 벗어, 씻겨 주께."


소년의 엄마는 땀냄새를 풍기며 뛰어 내려오는 아들을 멈춰 세운다.


"알았어요. 제가 혼자 씻을 테니까 엄마는 엄마 일 보세요."


대꾸는 당당하게 했지만, 혹시라도 뜨겁게 달구어져 퉁퉁거리고 있는 팬티 속을 들킬까 봐 소년은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소년의 느닷없는 정색에 엄마는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중학생이라고는 하지만, 홀랑 벗겨서 때도 밀어주고 비누칠도 해주던 것이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기 때문이다.


"야! 너 갑자기 왜 이러니. 이제부터 엄마랑 내외하기로 했나 보네."

"나도 이제 중학생이니까 제 스스로 해볼게요."

"호호호! 우리 성님 아들 다 키우셨네. 진택이도 이제부터 사내구실 하려나 보오. 집에 사내가 한 명 더 늘었어요."

"거참 대길이네는 애 앞에서 자꾸 그런 소릴 하누. 쓸데없는 참견 말고 어서 가서 대길이 저녁이라도 먹여."


소년은 딱딱해진 아랫도리를 엄마와 대길이 엄마에게 들킬까 봐 걱정이다. 황급히 우물가로 뛰어가 혼자 등목이라도 해서 가라앉혀 볼 참이다. 목욕을 마칠 때까지 딱딱해진 아랫도리는 별반 변화가 없다. 온몸에 우물에서 길어 올린 찬물을 끼얹어 봤지만, 오히려 경아 엄마의 나신은 더 뜨거운 불그림으로 떠오른다. 머릿속은 온통 골목 비너스로 가득 차고, 물을 끼얹던 소년은 화들짝 놀란다. 아까 그 비너스가 물바가지를 쏟아붓던 모습을 흉내 내며 물을 끼얹는 자신을 발견한 것인데, 비너스가 자신에게 완벽히 아로새겨졌다는 생각이 들자 소년은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방에 앉았지만 골목 비너스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싹을 틔우더니 점차 또렷해지고, 이내 그냥 방에 있을 수가 없다. 월담을 하거나 문을 두드려 볼 정도까지의 용기는 아니고, 그저 조금 전에 비너스가 서 있었던 현장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확인해보고 싶을 뿐이다. 소년은 옷장을 뒤져 최대한 펄렁거리는 바지를 찾아 입는다. 엄마가 시원하겠다며 장날에 가서 사 온 옷인데, 평소엔 양아치나 건달 같다며 잘 입지 않던 옷이다.


"엄마!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이 녀석이 오늘 이상하네. 저녁밥상 차리는데 이 시간에 어딜 간다고 그래?"

"금방 올게요. 요 앞에 큰길까지만 잠깐 갔다 올게요."


골목으로 나선다.

경아네는 바로 뒷집이긴 하지만, 대문 방향이 달라 약간 구부러진 골목을 몇 발짝 돌아가야 한다. 물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지만, 경아네로 향하는 골목을 바라보니 왜 그런지 모르게 소년의 가슴이 묵직하게 퉁퉁거린다. 평소에는 친구들과 골목이 떠나가라 뛰어다니기도 했건만, 마치 살얼음 판을 걷는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이리 조심스러울 수가 없다. 이 골목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번처럼 조용한 걸음은 난생처음이다.

샘솟는 기대감과 아까의 죄책감이 동시에 소용돌이친다.

골목을 돌아서면 누구의 집이 있는지 잘 알기도 하거니와, 골목을 돌아서면 어떤 상황을 마주칠지 전혀 모르는 까닭이다.


'골목의 끝에서 경아 엄마와 맞닥뜨리면 어떡하지, 경아네 대문이 열려 있으면 어떡하지......'


뜨거워진 아랫도리만 아니라면, 아무 생각 없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면 되는 골목이다. 짧지만 휘어진 골목이라 다음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오만 가지 생각이 잦아든다. 가로등이 매달려 있는 전봇대를 기준으로 골목은 오른쪽으로 살짝 휘어져 있다. 그 미지의 짧은 곡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소년의 죄책감을 살포시 감추어 주는 것 같다. 이전에는 이리저리 굽어진 골목길이 신작로처럼 직선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거나 심부름을 가기 위해 굽은 골목을 뛰어 나가다 보면 연탄 배달 아저씨의 수레와 부딪히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의 무거운 시장바구니들을 걷어 차 야단맞기 일쑤였다. 그랬는데 오늘은 한 걸음 앞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골목의 휘어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골목의 안쪽에서도, 골목의 바깥쪽에서도 서로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지금 관음의 어둠으로 가득한 소년의 일그러짐이 숨어들기에는 그저 그만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찰나인 듯, 억겁인 듯 모를 시간이 지나고 소년은 어느새 굽이가 시작되는 전봇대 앞에 이르렀다. 이제 딱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미지의 골목과 조우하게 된다. 소년이 다음 걸음을 위해 숨죽이며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경아네 집 쪽에서 철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철컹철컹 끼기긱"


소년은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를 맞닥뜨린 것은 아니지만, 그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충분히 짐작된다. 왜냐하면 골목 안쪽을 훑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이미 꽃같이 환하고 좋은 향기가 묻어 나오는 까닭이다. 이제 막 등목을 마친 자신에게서는 그저 새물 냄새가 날 뿐인데 골목의 굽이 너머에서는 제법 세련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또각또각"


이내 녹슨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이힐 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뒤로 돌아 달아나려면 기회는 지금 이 순간뿐이다. 그러나 향기를 발산하는 골목 비너스를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도 지금 뿐이다. 지금 도망친다면 소년이 본 것은 여체에만 관음을 집중했던 포르노이고, 골목 비너스와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눈다면 소년의 호기심은 살아 숨 쉬는 예술작품을 본 것으로 덮어 버릴 수 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소년의 머릿속은 슈퍼컴퓨터 같은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내고 있다. 소년은 골목의 앞과 뒤를 돌아보더니 자욱했던 갈등의 커튼을 열어젖힌다.


"에잇! 결심했어."


골목에는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깊은 어둠이 굽이진 골목을 파고들었지만, 게으른 반장아저씨가 가로등 스위치를 켜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처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골목인 탓에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히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판단을 하지 못한다. 마법처럼 아름다웠던 노을빛은 골목 구비마다 완전히 스며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목동의 눈치를 받으며 양을 몰던 순진한 양치기 개가 목동을 속인 늑대로 본색을 드러낸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컴컴한 골목으로 변했다. 그래서 나는 소년이 굽어진 골목으로 나아갔는지, 혹은 뒤로 돌아 자신의 집으로 달아났는지, 어느 방향으로 향해 갔는지 제대로 보질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굽어진 골목이 마치 색소폰의 울림통 처럼 되어 소년의 운동화 발자국 소리와 하이힐 소리가 또렷이 겹쳐 들렸고, 소년의 새물 냄새와 여인의 향기가 섞여 오래도록 골목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골목 대장은 leader of the kids가 아니라, 골목의 을 기록한 a ledg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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