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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Mar 24. 2024

오키쿠와 세계(사카모토 쥰지, 2023 전주국제영화제)

순환이 아닌 과거와 현재의 단절, 脫歐入亞

세계를 아는가?

"세계"란 말이 열도에 처음 등장하던 시대를 다룬 극이다. 타짜도 아닌데 "똥"을 다루는 영화라니 급관심이 간다.


2024.2.21. 한국 개봉을 기념해 내한한 사카모토 준지(66) 감독은  “팬데믹 시기,‘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위기감에서 영화가 시작됐다"며,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가운데 희망을 담고 싶었다”라고 했다.

종말이 불러온 희망이라니 너무 어렵다. 하지만 감독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아야지...


전체적인 소재와 영화가 얘기하는 외적인 주제들로 살펴보면, 영화 ‘오키쿠와 세계’는 19세기말 일본 에도의 분뇨수거업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똥이 거름이 되고, 거름이 음식이 되고, 음식이 다시 똥이 되는 순환을 비교적 심심찮게 그려 낸다. 


주인공 세 명이 만나는 첫씬은 똥간이다

첫 장면부터 똥간에서 시작해 영화는 내내 똥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보고 나면 맑은 비가 씻어 내리고 하얀 눈이 덮인 듯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후한 평을 주었다. 감독이 원하는 바대로, 감독의 의중을 잘 파악해 주는 고상한 영화평이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다소 삐딱한 시선을 보유한 필자는 감독의 드러난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열도인에게 유전적으로 잠재된 매우 다른 "세계"를 보았다.

전통을 "똥"같은 구태로 보는 열도 특유의 "탈아입구脫歐入亞"라고나 할까. 감독은 선순환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열도인의 특징이 잘 드러난 영화이다.


왜 그런지 세 명의 주인공들을 간략히 살펴보시라.


분뇨를 수거해 거름으로 파는 야스케
야스케

19세기말, 유럽의 신문물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야스케는 과거의 계급체계를 상징하는 사무라이와 하층민들이 살아가는 공동주택의 분뇨를 수거해 비료로 판매하는 업자이다.

그의 직업관에 따르면 똥이 거름이 되고, 거름이 음식의 중요 성장 비료가 되고, 음식이 다시 똥이 되는 것이 순환이라고 하지만, 실제 그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  부단히 과거를 삭제하는 일을 하는 인물이다. 싸면 치우고, 싸면 치우고... 심지어 자신이 싸는 것도 치우기 위한 분뇨통에 싼다.


야스케가 수거하는 똥은
구태한 계급사회가 배설하는 것들이다.


즉, 당시 일본의 전통들을 상징하며,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려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그 감추고 싶은 전통을 퍼내 삭제해야 한다. 하지만 숨기고 싶고, 없애고 싶은 그 열등함 조차도 종국에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밑거름으로 쓰일 수밖에 없다.

야스케는 사무라이들과 분뇨값으로 언쟁을 벌이다 급기야 분뇨통을 사무라이의 얼굴에 쏟아붓는다. 계급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사무라이나 자신이나, 똑같이 더럽고 역겨운 구태한 열도인 일 수밖에 없다는 격한 표현이었다.


폐지수거업자 츄지는 더 많은 수입을 위해 분뇨수거업으로 변신한다.
츄지

글을 모르는 츄지는 사찰이나 관공서를 돌며 폐지를 수거해 종이재생업체에 가져다 파는 일을 한다. 그가 수거한 폐지바구니에는 성스런 경문도 있고, 중요한 계약서나 서적이 들어 있기도 하다.

어느 비 오는 날, 그는 분뇨수거업자 야스케를 만나게 되고,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말에 경문이나 서적 따위를 수거하던 일을 과감히 내팽개쳐 버린다.


츄지는 '도자기전쟁(임진왜란)' 이후,
통신사를 통해 조선을 받들던
에도막부의 고고한 문관들을 상징한다.


츄지가 폐지수거 일을 내팽개치고 야스케를 따라나서는 것은, 마치 그들에게 밥을 담는 도자기그릇을 전해주고 글을 알려 준 대륙의 조선을  일순간에 버리고, 유럽의 신무기에 눈을 뜨는 19세기말 일본의 메이지유신 세력을 보는 것 같다. 나중에 오키쿠에게 글을 배우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매우 충실히 하는 인물이다. 오랜 전통으로 고착화된 계급을 무시하고 오키쿠에게 다가섬으로써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츄지는 돈 앞에서 경전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하는, 후일 경제동물이라고 세계의 비웃음을 받게 될 일본 신인류의 선두주자인 셈이다.


은퇴한 막부 사무라이의 딸 오키쿠
오키쿠

은퇴한 사무라이의 딸로서 고고한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노쇠한 아버지와 결투를 벌이는 신진 사무라이들에 대적하다가 목소리를 잃게 된다.

오키쿠의 목을 다치게 하고, 에도막부의 끝물 사무라이였던 아버지를 죽인 사무라이들은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막부 정권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조슈번의 사무라이들로 보인다.


오키쿠가 부상을 당해 목소리를 잃는 것은,
조슈번이라는 강력한 신진세력의 등장과
그들이 도모하는 새로운 세계를 대하며, 시대변화라는 거대한 조류에 침묵을 강요당한  과거의 에도막부 세력들을 상징한다.


계급사회가 지속된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전개인데, 그녀는 하층민인 츄지에게 호감을 갖게 됨으로써, 기꺼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 아버지라는 과거에 연연하던 자신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맞이 할 준비를 하게된 것이다.


폭우로 인해 똥간이 범람하고 모두가 야스케와 츄지를 기다린다.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폭우가 내리고 모두의 똥간이 역류한다. 마치 기생충에서 지하 화장실의 변기가 역류하듯.

(*꿋꿋하게 팝콘과 음료수를 드시던 분... 엄지 척 해드림)


쏟아지는 비(雨)로 상징되는 새로운 문물이 일본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평범하든 특별하든 그들이 전통으로 알고 지내던 모든 것들이 냄새나고 역겨운 것으로 변했다.

집주인도 사무라이도 하층민도, 그들 모두가 쏟아 내었던 똥 즉, 전통이란 것들은 새로운 문물의 등장에 보존가치라곤 없는 한낱 폐기대상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에도막부라는 전통을 지키던 오키쿠의 아버지는 코를 막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구태한 일본은 역겨움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삶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다소 역겨운 이 장면이 지난 후, 야스케와 츄지가 등장해 역류한 분뇨를 말끔히 치워 내고, 얼마 뒤 오키쿠의 아버지는 죽고 오키쿠는 목소리를 잃는다.

(*대부분의 분뇨는 골판지를 물에 불려 거품발생제를 섞었고, 배우들의 얼굴에 접촉되는 분뇨는 밀가루를 이용해 들어졌다고 한다.)


1875년 강화도 초지진 파괴

영화의 배경으로부터 채 40년이 지나지 않아, 운요호가 조선을 침략한다. 임진왜란 이후 280년 만이었다.

폭풍 같은 신세계가 몰고 온 구라파(유럽)의 신문물로 인해 열도의 전통은 역겨움으로 평가되고, 그들이 그렇게나 되고 싶어 하던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인이 되자)"의 욕망은 스승의 나라 조선을 뒤집어 는 것으로 싹트기 시작한다.



감독이 밝힌 제작의도와는 많이 다르기에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는 만들었을 뿐이고 필자는 보고 생각한 바를 적을 뿐입니다. 단순히 반일이나 배일 사상이 적용된 영화평은 아닙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스로를 향한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겨우 저랬던 이들에게 멸망당했던 선진국 조선이 한심스러웠다는 자책이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세계를 더 빨리 보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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