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새로운 영화들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어찌들 먹고살고 계신지... 다들 힘내시라. 산정을 불어닥치는 제 아무리 거센 바람도 반드시 꺾이는 날이 오더라. 집콕으로 영화 다시보기~
글로벌 IT, 웨어러블 전문기업의 CEO '박사장'은 회사를 스스로 일군 유능한 인물이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와 댄디한 슈트 패션으로 젊은 CEO다운 젠틀한 매력을 뽐내는 박사장은 겉모습부터 '기택'과는 대조적이다. 안정적인 직업과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딸, 아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고 있는 박사장은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가장의 모습을 선보인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 그의 저택에 빌붙어 생활하는 기택네 가족과 문광네 부부는 마치, 숙주에 모여든 <기생충>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세상을 "관계의 흐름"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진짜 기생충은 오히려 박사장 네 가족이다. 물론 영화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으로만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문광의 남편은 대만 카스텔라를 하다가 폭망 했고, 기택네 가족들도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나은 삶을 위한 치열한 활동을 한다. 나름 세상을 굴러가게 움직이는 에너지 조합체들인 것이다. 반면, 영화 내내 박사장은 세상을 위한 봉사활동이나 기부 같은 '세상과의 감정 공유 활동'이 안 보인다. "선을 넘는 사람들이 제일싫다"며 오직 자신의 "캐슬"을 지키는 것에 급급할 뿐이다.
그런데 그가 만든 IT제품이라 할 수 있는 휴대폰이나 헤드폰, 웨어러블 기기 등등은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냄새'를 가진 기택네에게 팔려나간다. 어쩌면 와이파이를 찾기 위해 들고 다니던 휴대폰이나 변기에 앉아 귀에 꽂았던 이어폰이 박사장의 제품일 수도 있다.심지어 지하실에 처박혀 지내는 근세도 박사장의 성공스토리를 보며 박사장을 응원하고 있었다.
박사장은 기택 네로 대변되는 경제적 하층민의 구매활동으로 부를 성취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에서는 그들의 "냄새(=가난)"를 없애주기 위한 어떠한 적극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그저 그들의 냄새가 싫다며 고개를 돌릴 뿐이다.마지막 파티에서도 인디언 분장으로 마치 기택네와 동족인듯 행동했으나 결국 다른 냄새를 견디지 못해 죽음을 자초한다. 박사장은 자신의 발이 되어주었던 윤기사의 노고를 치하하기보다는 자신의 차를 불결하게 오염시킨 것으로 오해해 혐오의 감정을 표출하고, 박사장의 아내 연교는 가족들을 케어해주었던 문광의 건강보다는 자신들이 전염될까만 걱정한다.
자본주의의 병폐로 빈부가 더욱 극명해지는 세상이다. '돈'은 아무 생산활동을 하지 않아도 '돈'을 재생산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 눈앞에는 생산설비도 없고 생산된 물건도 없다. 그냥 숫자로 움직이는 돈만 불어나고 있을 뿐이다. 실제 세상에 실물화된 화폐는 겨우 60조 원 정도라는데 돌아다니는 자본의 가치는 그것의 10배 100배라고 한다. 돈은 우리 자본주의 세상 전체가 골고루 사용해야 할 영양분인데 그것들은 순환되지 않고 철저히 자본 소유주에게만 일방통행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봉준호 감독은 시대의 흐름인 "빈부 차이"를 화두로 던져주었고, 많은 관객이나 평론가들은 박사장의 돈을 빨아먹는 기택네와 문광네를 기생충이라고 결론짓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기택네, 문광네와 삶의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동감하는 관객들 스스로도 "나도 세상의 기생충"이라는 자조 섞인 한숨을 숨기지 않는다. 마치, 숨겨진 가난의 옷이 철저히 발가벗겨진 듯한 불쾌감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함께 영화를 보았던 친구도 "어쩌면 우리가 사회의 기생충이겠지..." 라며 스스로를 낮추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대다수는 그런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진 보편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사랑>이다 기택이 박사장에게 "사모님을 사랑하시죠" 묻는 장면이 있다.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사랑>,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박사장은 끝끝내 그 보편적인 가치인 <사랑>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거실의 소파에서 아내와 섹스를 하고 절정의 순간에도 박사장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박사장이 보기에 기택이 말하는 "사랑"은 존재하지도 않고 냄새나는 집단의 비현실적인 가치였을 테니까.
숙주는 숙주인 스스로를 사랑하고, 기생충도 숙주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자신과 가족, 친구와 동료를 사랑하는 우리들은 세상의 숙주, 세상의 주인인 것이다.
기생충을 "다른 동물의 몸에 기생하며 영양분을 빼앗아 생활하는 동물"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파악할 때, 박사장 가족에게 소소한 도움들을 주면서 월급이라는 정당한 댓가를 받는 방식으로 부를 나누어 함께 살아가겠다는 기택네와 문광 부부는 정말 기생충일까? 영양분의 흐름을 보면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는 일방통행이다. "냄새"나는 빈자들의 소비를 통해 부를 성취할 뿐이고, 그들에게 나눠준 <급여>라는 영양분을 IT제품을 주고 유혹하여 다시 빨아가는 박사장,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 빈민층의 영양분은 빨아먹으면서 그들의 치열한 삶의 냄새를 오히려 혐오하는 박사장이 봉준호 감독이 박멸하고 싶었던 숨은 기생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