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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Aug 21. 2020

라면 (3)

명품 라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아마 많이 되어 봐야 대, 여섯 살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잠결에 "일어나! 놀러 가자"는 아버지 말씀을 듣고 눈을 비비며 대문 밖으로 나서니, 아버지의 직장 후배께서 차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깜깜한 새벽의 한 중간을  왕방울 같이 큰 헤드라이트로 가르던 누르스름한 차였습니다.  본닛 위에 타이어가 얹힌 데다 옆문이 두 개뿐이라서, 차 뒤쪽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자는 창문을 등지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아야 하는 요상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도 여전히 훨씬 세련된 모습으로 생산되고 있는 영국의 고급 자동차 '랜드로버 시리즈 2'였습니다.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SUV계의 명품이지요. 버스도 찦차도 아니었던 첫인상이,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걸 보니 어지간히 특이했었나 봅니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자유로운 방랑자의 생활을 만끽하고 싶은 것은 그때 만났던 "랜드로버"의 영향이 분명할 것입니다. 


land 땅의(대지의) + Rover 방랑자(유랑자)이니까요...


중심조차 잡기 힘든 보조석에서 한참을 흔들리며 도착한 곳은 밀양 재약산 아래에 있는 표충사의 층층폭포가 있던 계곡, 무엇을 구경하고 얼마나 그곳에 있었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하얗게 얼음이 얼어있던 계곡과 큰 바윗돌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칼바람을 피하며 라면을 끓여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날씨가 춥다 보니 코펠 뚜껑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하얀 김과 탱글탱글한 면발, 뜨끈뜨끈 버얼~건 국물과 탱탱한 면발 사이에 어우러져 사각사각 씹히던 김치가 혀를  쥐락펴락하는 대향연이었습니다.

어찌 잊히겠습니까. 세상 끝 날까지 남아있겠지요. 아버지가 직접 끓여 주셨던 겨울 재약산 계곡에서의 라면

지금은 아버지께서 별이 되신 터라,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게 된 제 인생 최고의 명품 라면이었습니다.

라면 한 그릇 앞에 두고 묵묵히 하늘 한 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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