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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Apr 13. 2021

도시락

엄마의 빈자리

점심식사를 마치고 양치질을 했는데 입 안을 헹구다 보니 수돗물 특유의 익숙한 냄새가 난다. 고등학생 시절 자주 맡았던 냄새이다.

고등학교 배정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마당에 쓰러지셨다. 동짓날 먹고 남은 팥죽이 아깝다시며 다음 날 그걸 식은 채로 드신 것이 급체를 불러왔고, 하루 종일 굶으시다가 약국에서 조제약을 사드셨는데 그게 현기증을 불러온 것이다. 심각한 뇌진탕으로 급히 수술을 했지만 결국 일주일의 사투를 버텨내지 못하셨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신없이 혼란한 장례식을 마친 뒤에 장거리 출장이 잦은 아버지께서는 남매들을 모아 놓고 서로가 돕지 않으면 아주 힘든 가정이 될 것이라는 '경고 아닌 경고'를 하셨다. 가감 없이 솔직하게 우리에게 닥친 현실과 다가 올 곤란들을 말씀해주셨다.

빨래하는 방법, 설거지하는 방법, 청소하는 방법, 밥하는 방법  등등 엄마가 해주시던 가정운영에 관한 부분들을 몸소 보여주시며 일일이 알려 주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 날 아버지의 훈시는 어린 자식들에게 단 일말의 어리광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냉정함이었다. 물론, 그것이 아버지가 우리 남매에게 주신 절제된 최선의 동정심이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처음 현실 자각을 한 것은 도시락을 싸는 일이었다. 아침 식사는 거르고 등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지금도 그때의 습관으로 아침식사를 하면 하루 종일 속이 더부룩하다. 정성스럽고 가지런히 정리된 반찬이 자리 잡은 도시락은 엄마의 존재 증명이던 시절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도시락 뚜껑을 열 때 살짝 드러나는 계란 프라이는 정말이지 엄마표 도시락의 상징이었다.

그 당시는 맞벌이가 흔치 않아서 엄마의 빈자리를 설명하는 것이 지금처럼 쉬이 둘러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왜 도시락이 없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도시락을 싸주실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다.


지난밤 먹고 남은 밥이 전기밥솥에 남아 있으면 도시락에 담고 김치만 챙겨서 학교로 갔다. 친구들에게는 밖에서 하늘 보며 식사할 거라 둘러대고 운동장 한켠에 있는 등나무 밑에서 김치 반찬을 꺼내 먹었다. 국이 없어 목이 메면 수도꼭지의 물을 도시락에 받아 물을 말아먹었다. 수돗물의 염소 냄새를 강렬하다 느낀 게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으리라.

지난밤 전기밥솥의 밥이 남아 있지 않은 날은 그나마의 호사도 누릴 수 없어서 빈 도시락을 챙겨 갔다. 지금 생각하면 센치하기 그지없는 객기다.

용돈이 여의치 않아서 매점을 매일 이용할 처지도 아니다 보니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짝지에게 매점에 가서 사 먹는다고 둘러대고 등나무 쉼터에 누워 오침을 청하기 일쑤였다. 못 견딜 만큼 배가 고픈 날은 수돗가에 가서 빈 도시락에 물을 받아 마셨고, 나중에는 소독약 냄새를 조금이라도 잊어보려고 집에서 설탕을 챙겨 와 설탕물을 만들어 마시는 잔꾀도 부리게 되었다.

도시락은 엄마의 존재 증명이고, 수돗물은 엄마의 부재 증명이었다.

그때 길들여진 냄새가 오늘 가글을 할 때 느껴졌다. 자주 사용하던 수돗물인데 봄을 타서인지 아니면, 특별히 염소를 많이 사용한 탓인지 유난히 냄새가 많이 난다.


기껏 수돗물의 소독약 냄새 따위에
엄마가 그리워지다니.....
참으로 멋도 없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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