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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May 15. 2021

발치 그리고, 임플란트

치아 장례식과 손가락 장례식

풍치로 인한 주기적인 고통을 오랜 세월 동안 견뎌왔지만, 드디어 한계가 왔다. 결국 치과 상담을 통해 발치와 함께 임플란트 시술을 받기로 하였다.

나이를 먹어도 치과 치료는 여전히 힘이 든다. 각종 기구의 소음과 여러 가지 냄새 그리고, 혀가 느끼는 불쾌한 약물의 맛. 무엇보다 힘이 드는 건, 완벽히 저항할 수 없는 자세로 누워 의사와 기공사들의 장갑 낀 손이 입 안을 휘젓는다는 점이다.

세 개를 한꺼번에 뽑는 대공사이다 보니, 마취 후에도 한참을 치아를 긁으며 실랑이하는 소음, 드릴의 진동이 머리를 울린다.  마스크 너머 의사의 힘에 부치는 듯한 숨소리가 한동안 폭풍처럼 들려온 뒤에야 겨우 발치가 마무리되었다.

발치한 이빨들은 챙겨드릴까요?


치를 보조하던 간호직원이 묻는다. 어릴 때 지붕 위로 유치를 던지며 제비에게 새 치아를 물어오라고 노래하던 경험이 있긴 했지만 찰나의 순간에 긴 고민에 빠져들었다.

내 인생 마지막 치아들,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품 같이 소중한 치아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된 치아들...... 오늘은 치아들의 장례식을 하는 날이구나.

생각이 여기쯤에 미치자 문득 초등학생 시절의 어느 하룻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던 충격적인 시가 떠올랐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어떤 경로로 접하게 되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만...


<손가락 한마디>   -한하운 시인-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마디 살 한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한국 최초의 한센병 시인으로 기억되는 한하운 시인. 그 당시 어린 마음에 이 시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손가락 장례식이 아니라, 종종 할머니를 찾아오는 노부부가 한센병 환자들이셨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눈썹도 없고 코도 뭉그러진 노부부를 가리켜 "문둥이"라고 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시각장애까지 있으셔서, 집안에 들어오셔서도 늘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계셔서 더 무섭게 느껴졌다(그 시절 선글라스는 간첩들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우리 집에 왕래하는 것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어린 나에게 "너도 문둥이 된다. 조심해!"라며 겁을 주곤 했다.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얼굴이 무섭기도 하고, 애기 간을 먹는다는 괴담도 떠올라서 솔직히 그분들이 무서웠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분들의 방문을 환영했고, 과일과 간식을 나누셨다.

다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분들이 매번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오셔서 나누어 주셨다는 점이다. 70년대 그 시절엔 서민들에겐 달걀도 꽤 귀한 음식이었으니 할머니는 물론, 가족들의 찬거리를 담당하시는 엄마께서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가끔씩 삶은 달걀을 가져오셔서 손수 껍질을 까서 내게 주시곤 했는데, 달걀보다는 몇 마디가 없는 손가락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선뜻 먹기가 그래서 "고맙습니다" 라며 냉큼 받아 들고는 우물가로 쪼르르 달려가서  씻어 먹기도 하였다.


오늘 치아 장례식을 치루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귀하디 귀한 손가락 장례식을 절절히 써 내려간 한하운 시인의 비통함이 느껴졌다. 덤으로 할머니와 친구 부부들도 떠올렸고......


소록도를 다루는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PD와 얘기를 주고받던 어느 한센병 환자가  다큐멘터리 중에 얘기한 대사가 생각난다.

금수강산 삼천리가 내 무덤이요.
엄지 손가락은 설악산에, 검지 손가락은  강화도에
그리고, 새끼손가락은 부산의 어느 암자 뒤뜰에 묻어 주었소.

천형(天刑)의 고통을 겨우 치아의 고통과 비교하다니, 생각하니 참으로 얄팍한 '글질'이 송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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