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가수 김정호의 '하얀 나비'가 라디오에서 울려 나옵니다. 알 수 없는 한이 묻어 나는 청아한 목소리를 듣다 보니 하얀 나비를 애타게 기다렸던 청소년 시절 생각이 납니다.
어린 시절 화초를 좋아하시던 부모님께서는 네, 다섯 평쯤 되는 미니 정원을 가꾸셨습니다. 채소보다는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한쪽 귀퉁이에는 수세미 넝쿨도 자라고 있었으니 소일거리 수준의 "텃밭"이라기보다는 좀 더 고급진 "정원"이라는 명칭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겨우내 냉해로손상을 입을까 봐 비닐하우스로 보온까지 해주는 정성을 기울여서인지 봄이면 화단 가득히 꽃이 피어났고, 의례히 나비들이 날아들었습니다. 하얀 나비, 노랑나비, 파란 나비, 호랑나비 등등......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느 날엔가 날아든 하얀 나비를 손으로 잡아 보려고 화초 사이를 여기저기 들쑤셨습니다. 그걸 보신 엄마께서 살짝 믿기지 않는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죽으면 다음 해 봄에 하얀 나비가 되어 집으로 온단다. 새 봄에 처음 집에 날아오는 하얀 나비는 가족 중의 누구일 수도 있단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신다며 정색하겠지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감성 소년에게는 오히려 그 얘기가 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나비를 괴롭히거나 화초 밭을 뭉개는 것을 말리시는 감성 어린 지적이셨을 겁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도 하얀 나비를 단 한 번도 괴롭힌 기억이 없으니 어쨌거나 그 교육은 대단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채 두 해가 지나지 않아 엄마는 14살짜리 막내를 두고 하늘나라로 가버리셨습니다. 남은 가족 모두가 너무나 졸지에 당한 일이라 슬픔에 빠져 들 시간조차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지난하고도 추웠던 겨울이 가는 동안 가족 중 누구도 정원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지만, 어김없이 다음 해 봄에는 알록달록 꽃들이 피었습니다.
꽃 향기가 집안에 퍼져서였을까요... 한가한 일요일 아침을 보내던 중에 열린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날아든 하얀 나비를 만났습니다. 순간 소~름, 갑자기 엄마가 일러주셨던 전설이 생각나 시나브로 나비를 따라가며 외쳤습니다.
엄마! 진짜 엄마가 온 거야?
방안을 한참 날아다니던 나비는 이내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요즘도 가끔 방에 누워있다 보면 하얀 나비가 천정을 날아다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날은 분명 엄마께서 집에 들르신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당연하게도엄마께서는 들려주신 전설을 몸소 실천하시면서 약속을 지키실 분이었니까요.
지천으로 봄 꽃이 물든 요즘은 도심에서는 어렵지만 교외에서는 종종 하얀 나비를 만납니다. 아니,나비가 아니라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신 엄마를 만나며 마음속으로 어리광을 피워 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웃픈 해프닝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간절히 고함쳤습니다. "막내 울음소리는 저 세상에서도 들린다"는 어른들 말씀처럼 엄마는 막내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나 봅니다. 어쩌면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