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불꼬불 이어지는 부산의 아슬아슬한 산복도로를 지나는데 익숙한 사내의 낭랑한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려온다. 아련함과 아쉬움이 담겨있고, 베이스 부분에서는 약간의 쇳소리가 깔려있는 뭔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듯한 목소리다.
그는 시베리아 대륙으로부터 한반도의 끝자락까지 호령할 만큼 대단한 클래스의 이름을 가졌지만, 그의 외모는 비쩍 마른 장작 깨비처럼 보인다. 행여 태풍이라도 불라치면 하늘 높이 날려간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본새이다.
근래 들어서는 희끗한 머리칼까지 더해져 그는 더욱 수척하게 보인다. 무대 위에서 통기타를 부여잡고 마치 음유의 신이 강림한 것 같은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오랜 시간 동안 콘서트를 하는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탈진해서 쓰러질 것만 같아 보인다.
그는 젊은 시절에 결핵을 앓기도 했지만, 늘 중병을 앓는 환자처럼 빼빼 마른 체형을 가졌었다. 흔히 소설을 읽을 때 상상하는 '폐병환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게다가 단추 구멍처럼 작은 눈과 사내답지 않게 가녀린 입술 라인을 가진 터라 그는 더욱더 폐병환자처럼 보였다.보건소의 결핵 씰 판매 광고에나 딱 어울릴 것 같았던 사내, 어디 가서 사내구실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그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젊은 시절 그에게도 운명처럼 나타난 여인이 있었다. 그는 청춘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그녀의 집 앞에서 숱하게 많은 밤을 지새웠고, 그녀의 부모님께 교제를 허락받기 위해 그녀의 집 담을 무단으로 넘어갔다가 그녀의 오빠에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파출소에 끌려가기까지 했다.
그는 역시 사내였던 것이다. 그 일련의 소동들을 안 날로부터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그를 보노라면, 그의 눈에서는 왠지 모를 이글거림이 느껴졌다.
그는 굴하지 않았고 이런 일은 몇 차례나 더 반복되었는데, 그런 그의 집요함을 꺾게 만든 것이 바로 "폐병 환자 같다"라는 여자 쪽 집안의 서슬 퍼런반대였다.
물론, 연예인을 '딴따라'라고 비하하는 사회적 편견이 널리 퍼져있던 시절이었으니 어찌 외모만으로 반대를 한 것이라 하겠느냐만은, 나중에 그 여자분의 집안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는 표면에 드러난 딴따라도 아니고 그의 가난도 아니었다.
그저 "폐병환자 같이 생겼는데 시집보내서 일찍 과부 되면 어쩌누......" 하는 이유였다.
결국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그녀는 다른 혼처를 찾아갔다.
그날 이후로 그의 노래에는 독기가 묻어 있었다. 실연을 달래기 위한 광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노래에는 유함이 사라졌었다. 그렇게 각다분한 노래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눈 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라' 곱씹었건만 아쉽게도 그가 살았던 부산에는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이 훨씬 많았다.
그는 이제 칠순을 넘겼다. 여전히 무대에서 노래하고 통기타를 퉁기고 있다. 그와 결혼했어도 결코 과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스스로 오랜 세월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의 관찰 반경에서 사라진 이후로 그의 삶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이혼이나 재혼 같은 일상들이 간간히 가십 기사에 오르 내리기도 하였으나, 크게 애면글면 하였던 것은 아니었듯 한데 그의 나이 마흔다섯에 발표한 노래는 그를 톱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노래를 깃점으로 그 노래 이전과 그 노래 이후로 그의 삶이 바뀌고, 또한 노래를 음유하는 목소리가 바뀌었다. 어쩌면 그는 젊은 날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오랜 세월을 할애했던 것일 수도 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스스로가 늙어감을 깨닫고,
떠나 간 그녀가 자신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인생을 노래할 수 있는 가수이자 슬픔을 추억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이 되었다. 젊은 날의 가난과 슬픔이 더 이상 목소리에 묻어나지 않게 되었다.
왕년에 히트했던 노래로 평생을 우려먹는 가수가 아니라, 온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노래가 세대를 아우르고 공감하게 만드는 노래를 무려 두, 세 곡이나 가진 가수이다.
빗질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듯한 희끗한 백발과 관리되지 않는 거친 수염들이 그의 자유로움을 보여 준다. 건강한 모습으로 계속 마음을 파고드는 노래를 발표해주면 좋겠다.
문득 노래를 듣다가 생각 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얘기를 적어두고 싶었는데 꿈 이야기를 적다 보니 이야기들이 다른 곳으로 많이 새 버렸다.
간 밤에 꾼 꿈을 이야기한 것이다.
나약해 보이던 그의 인생이나 외모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훌륭히 전환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잘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부러워 존경과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재담꾼의 수다일 뿐이니 특정한 인물에 빗대어 속절없이 과거를 파헤치는 따위의 행위로 불편해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