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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Jul 20. 2021

울지마 톤즈

"십자가 장사꾼"의 세 가지 쓰임과 백색 부활

7살이 되면 어른들에게 끌려가 총 쏘는 법과 수류탄 던지는 방법배운다. 자기 키만 한 무거운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고, 폭탄을 운반하며 어른들이 시키는 일들을 이것저것 하다 보면 어느새 함께 총을 들었던 친구들은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때론 친구를 죽여야 했고, 부모는 자식을, 남편은 아내를 죽이는 일들이 예사롭게 행해졌다. 남북으로 갈라진 내전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 모두들 그저 살아남는 방법만을 생각하게 되었고, 부모가 거나 자식이 죽어도 그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죽음은 반복되는 일상이고, 그들이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더 낯설었다.



누구도, 더 이상 어떤 꿈도 꾸지 않게 된 희망이라곤 없는 남수단의 조그마한 마을 "톤즈(Tonj)"라는 곳에 이태석이라는 이름의 한 동양인 신부가 나타났다.

그냥 늘 머물다 가는 "십자가 장사꾼", 소년들은 수단을 찾아오는 신부나 목사들을 그렇게 불렀다.

길면 2년, 그렇지 않으면 1년쯤 머물고는 이내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가버릴 신부 따위는 전장에서 목숨을 부지해 온 아이들에게는 '감정 사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날 밤엔가는 신부의 숙소에 동네 아이들이 침입해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어차피 우리를 버릴 거면 지금 당장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라!"

"나는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아무도 어린 자신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가서려고 애써도 그는 여전히 값싼 동정심을 발휘하는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성당을 먼저 지을 것인가,
아니면 학교를 먼저 세울 것인가...

첫 번째 쓰임 : 음악

아이들과 소통하고 싶었던 이태석 신부는 어느 날 아이들이 악기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한국의 지인들에게 부탁해 여러 가지 악기를 공수하고, 스스로 책이나 컴퓨터를 통해 여러 가지 악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먼저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태석 신부는 중학교 때 성가를 작곡할 정도로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며 성악을 하기도 하였다. 신께서 주신 음악적 재능이 있었기에 악기를 배우는 일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아이들도 조금씩 마음의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학교도 짓고, 아이들이 밤에도 책을 볼 수 있게 태양광 전기 설치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가 지휘한 브라스밴드(관악대)는 수단 곳곳에 소문이 나서 수단의 정부행사나 각종 지역행사에 초대받기도 했다.


두 번째 재능 : 의사

부산 남부민동의 피난민촌에서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던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었다. 가장이 없는 궁핍한 가정에서 지내보니, 그저 잘 살아서 가족들을 편히 살게 해주고 싶다는 열망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인제대 의대에 진학한다. 강원도 산간이 얽히고설키는 12사단에서 의무장교로 병역의 의무를 마친 그는 사제 서품을 받는다.

2001년 그가 몸담은 '살레지오(가톨릭 봉사단체)회'는 이태석을 전쟁의 상흔이 한창인 남수단의 작은 마을로 파견했다.

의사이자 사제였던 이태석 신부는 신분 고하와 수단 반군, 정부군을 가리지 않고 무료로 진료를 봐주기도 했으므로 그의 관악대가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단 한 건의  테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브라스 밴드야 말로 진정한 평화의 사도들이었던 것이다.

그가 생전에 입었던 <사제복, 의사 가운, 그리고 관악대의 지휘자복>이 그의 톤즈 시절을 잘 말해준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천부적이었던 음악적 재능과 의대 합격의 열정,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신께서 쓰시기 위해 예비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쓰임 : 죽음

예상치 못한 마지막 쓰임이 다가왔다. 평소 복부에서 약간의 불쾌감을 느껴왔다. 마침 2년에 한 번 주어지는 휴가를 이용해 한국에서 건강검진을 했다.  약간의 통증을 느끼기는 했지만 수단을 떠나 올 수 없어 미루고 미루었던 건강검진 결과는 대장암 4기...

이태석 신부는 진료를 하던 의사에게 매달렸다.

"제발 저를 고쳐주십시오. 톤즈에서 아이들을 위한 우물파다 말고 왔습니다. 제발 우물을 다  수 있도록 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결국 그는 48세라는 나이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이야기는 <울지 톤즈>라는 독립영화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이 영화는 그의 자서전 <친구가 되어주실래요>보다 훨씬 더 많이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덕분에 열악한 톤즈와 수단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슬프게도 그의 치열한 삶만큼, 고단했던 죽음도 많은 영향력을 남겼다. 톤즈에 갔던 다큐멘터리 PD가 "이태석"이라는 이름 석자를 얘기하면, 그를 안다는 모든 아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아이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아버지요, 어머니이며, 친구였다.

아무도 아이들의 과거를 보듬어 주지 않았으며 아이들의 현재를 살피지 않았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지만, 이태석 신부는 스스로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이태석 신부의 마지막 유언은 "Everything is good!"이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톤즈의 아이들에게 그들과 함께 했던 소중한 진심을 전해주고 싶었것이.


음악적 재능, 의사, 그리고 마지막 아쉬운 죽음으로써 톤즈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신의 쓰임"이길 마다하지 않으셨던 사제.

이태석 신부의 제자 중에 무려 57명의 아이들은 위대한 스승을 따라 하고 싶어서 의사가 되었다. 수단 역사상 한 마을에서 그렇게 많은 의사가 배출된 적은 없었다. 톤즈의 아이들에게 한낱 "십자가 장사꾼"이었던 그는 그렇게 화려한 백색의 부활을 했다.



그에 관한 다른 종류의 평가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의사, 음악가, 사제, 교육자, 전기기술자, 건축기술자, 요리사, 작가, 그리고 누군가의 친구...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했다는 것이다.

누구든 그를 비아냥거릴 수는 있지만 감히 그처럼 많은 일을 하지도 않았고, 하지도 못할 것이다. 필자 역시도...

후임으로 톤즈에 가신 봉직 신부님께서는 "이 많은 일을 혼자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는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세상에 아낌없이  베푼 "사랑" 그 자체였다.

부산 남부민동 <이태석 신부 기념관>

월요일 휴관, 평일과 주말에는 코로나로 인한 전화예약 부탁

(T. 051-257-1017)

주차는 뒤편 기념관 주차장(이태석 신부 생가 바로 앞) 이용하시고, 1층의 카페테리아에서 파스타, 샌드위치, 커피 등등 주방을 관리하시는 신부님이 직접 요리하시는 간단 메뉴로 식사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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