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로살아도괜찮다는허락

by 김진경

딸로살아도괜찮다는허락


#딸로살아도괜찮다는허락


사람은 살면서

어느 순간부터

자기 이름보다 역할로 먼저 불린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책임.


나는 그 이름들 속에서

나 자신을 조용히 뒤로 밀어두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웠다.


십 년 전,

나는 학원에 몸을 갈아 넣고

갤러리를 열었으며

공부와 일을 동시에 끌어안고 살았다.

석사와 박사는

열망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지우지 않기 위한 마지막 끈에 가까웠다.


그 시절,

사람들은 말했다.

욕심이 많다고.

이제는 애들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 말들은 모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말들 속에는

늘 같은 전제가 숨어 있었다.

너는 잠시 미뤄도 되는 사람이라는 전제였다.


그때,

친정엄마가 내 손을 잡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너는

누구의 엄마이기 전에

내 딸로서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 말은

위로나 격려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내 존재를

다시 불러주는 이름이었다.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

네가 하고 싶은 공부

네가 하고 싶은 일

다 해.”


나는 그 말에

등을 떠밀린 것이 아니라

마침내

기댈 곳을 얻었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믿었다.

자기 삶을 끝내 포기한 어른보다

자기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어른의 뒷모습이

아이에게는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그때 나를 말리던 사람들,

지금은 나를 쉽게 부르지 않는다.

시간은 늘

말보다 조용하고,

조용한 만큼 정확하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지금 망설이고 있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너무 늦었다는 말 앞에서

한 번쯤은 멈추지 말기를.


오 년 뒤의 나,

십 년 뒤의 나는

어느 날 완성되지 않는다.

오늘의 선택 하나,

오늘의 버팀 하나가

사람을 만든다.


요즘은 내 건강을 걱정해 주는 말도 듣는다.

고맙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삶의 문장을

끝까지 써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도

건강은 더 아끼고,

공부는 더 깊이 하고,

프리덤은 더 단단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미술 앞에서는

쉽게 서두르지 않고

쉽게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다.


한 획을 긋는다는 것은

어딘가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자기 그림자에게서

끝내 도망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엄마의 그 한 문장을 통해 배웠다.


집필중인 『그림자에게 말을 거는 법』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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