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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3.10월의 잔치

10월 중순. 출근해서 마시는 첫 커피의 온도가 변했다. 이제 따뜻한 커피에 손이 간다. 컵을 쥔 손바닥에 닿는 온기로 바뀐 계절을 느끼며 가로수가 길게 늘어선 길을 걸어본다.

겨우 내 움츠렸던 나무는 따뜻한 햇살에 여린 새싹을 올리고, 내리쬐는 여름 볕에서 잎사귀로 풍성한 몸을 만들었다. 이들은 바람이 살랑이면 서로 몸을 부비며 ‘나 여기 있어요’ 속삭이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지친 잎들. 그들은 몸에 내리는 빗줄기에 힘을 얻는다. 숙였던 잎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아마 저들은 비에게 고맙다고 말했겠지. 때로는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바람에 살아남으려 끝까지 버텼다. 이들은 자신의 수고에 상을 주듯 잔치를 준비한다. 예쁘게 화장을 하며 색색 가지의 옷으로 몸을 치장한다. 그 변화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나는 음악을 흥얼거리게 된다. 그리고 잔칫날을 기다린다.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느끼지 못했다. 작은 나무 하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의 변화를.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일어나는 변화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그 변화가 당연했던 건 아니다. 한참 사춘기 여고시절에는 꽃 피고 따뜻한 봄을 좋아했고, 한 번씩 빗줄기가 크게 내리면, 큰 창문 넘어를 보며 음악 듣는 걸 좋아했다. 국민 학교 어린 시절에는 동네 개울가에서 맘껏 물놀이할 수 있는 여름을 좋아했고, 기분 좋게 하는 눈 덮인 겨울을 기다리기도 했다.     

이런 내가 결혼을 한 후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세 아이를 양육하며 시아버지를 모셔야 했다. 내 안에는 낭만보다는 책임감과 피로함이 자리 잡았다. 최대한 시간을 아끼며 살아가야 했다. 우리나라의 특별한 사계절은 번거로움과 경제적 손실일 뿐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꿔줘야 하는 세 아이 옷. 장마철에는 피할 수 없는 마르지 않는 빨래와의 전쟁. 한여름의 냉방비, 한겨울의 난방비. 서툰 운전 때문에 폭설 때마다 앞서는 두려움. 이런 현실로 계절의 변화를 느껴야 했다.      

자연은 산과 들, 길 모퉁이의 작은 풀포기들을 내게 보여준다. 선물처럼 보여주는 자연의 모습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크고 넓었다.

그걸 이제야 안다. 가끔은 내 자신이 이 자연에 의지함을 느낀다. 기분이 좋아 이들 속에서 걷기도 하고, 우울함도 이들 속에 앉아 고뇌를 하기도 하며, 너무 힘이 들어 이들을 찾아 깊은 호흡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내게 눈치를 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은 오랜세월 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위한 나만의 고마운 선물임을 깨닫는다.      

쉰을 바라보는 내게 여유가 생겼나보다. 이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길어진다. 이제 나의 계절은 정열적으로 느껴지는 한여름이 아니다. 추위에 약한 탓에 게을러지는 싸늘한 겨울도 아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걸을 수 있는 이 가을이 좋다. 왠지 이 계절은 나를 시인으로 만든다. 높고 푸른 하늘을 한 번 더 바라본다. 하늘에 있는 조각난 구름도 좋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과 어우러진 흙냄새가 좋다. 추위가 더 오기 전 피어난 가을꽃들이 좋다. 옷깃을 여미는 살짝 차가운 공기와 바람이 좋다.      

나도 예쁘게 화장을 하고 예쁜 스카프를 매며 한껏 뽐을 내어 이들의 잔치에 함께 축하를 해주어야겠다. 이 잔치의 주인공은 과연 이들일까? 나일까?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다. 이들과 이렇게 호흡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나는 성공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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