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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리 Jan 12. 2024

놀이하는 인간, 헌신하는 인간

육아를 놀이로 바꾸는 첫 번째 시도 1

 연극은 영어로 ‘Play’(플레이)라고 한다. 극장에서 하는 연극은 보통 ‘Theatre’라고 하지만 플레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연극 행위 일체를 통칭한다. 플레이는 원래 ‘놀이, 놀다,’의 뜻이 있다. 연극을 왜 플레이라고 할까? 연극은 놀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누군가 혹은 무엇’이 되고, ‘너’는 ‘어떤 다른 것’이 되기로 ‘약속’하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끝까지 완수해냄으로써 어떠한 ‘성취감’을 획득한다.   

  

 어린아이들이 모여 소꿉놀이를 한다. 나는 아빠, 너는 엄마 역할을 하고 어떤 상황을 설정하여, 진짜 아빠처럼, 진짜 엄마처럼 행동한다. 가끔은 즉흥적이다. 그런 즉흥성에서 새로운 재미가 생기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 놀이를 통해 재미를 느낀다. 만약 이 모습을 보는 진짜 엄마, 아빠가 있다면 당황스럽기도 할 거고, 재미있기도 할 것이다.

이 놀이에 연극이 모두 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무대 위에서 한다. 햄릿 등 여러 역할을 각자 맡고, 이미 약속된 규칙(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연기, 연출적 설정 같은 것을 말한다)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함으로써 관객에게 감동을, 배우는 정신적 성취감을 느낀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의 본질적 특성을 두 가지 요소로 나눈다.


하나, 놀이는 실제적 목적이 없고, 행위를 하는 유일한 동기는 놀이 그 자체이다.

, 놀이는 참여하는 모두에게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이를 통해 승패가 나뉜다.


‘술래잡기’나 ‘말뚝박기’ 같은 놀이에는 승패가 분명하다. 소꿉놀이와 연극(놀이라고 한다면)의 승패는 재미있느냐 없느냐다. 그리고 재미와 함께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도 연극의 승패를 좌우한다.  관객에게 재미없고 의미 없는  연극은 진 연극이다. ㅜㅜ 음악, 미술, 연극, 스포츠, 문학 등도 마찬가지로 여기에 포함된다.


 놀이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깊은 논의와  예가들이 창작을 위해 피나는 노력한다는 걸 제외하고, 단순한 ‘놀이’라는 것으로만 보자면, 우리는 왜 힘들게 놀면서도 즐거울까?


산더미 같은 청소를 해야 하는데 너무 많아서 힘들다. 그때 누가 자기랑 빨리 치우기 시합해서 저녁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면, 없던 힘도 불쑥 생겨난다. 같은 행위를 하는데 일은 힘들고, 놀이는 즐겁다. 이 경우는 보상이라는 성취동기가 있어 놀이로 전환이 가능할 듯하다. 모든 놀이에는 연극처럼 재미와 의미라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


 그럼 엄마, 아빠가 해야 하는 육아도 참 힘이 드는데, 이것도 놀이로 바꿀 수는 없을까? 육아에 재미와 의미가 있을 수 없을까?


하위징아의 말대로라면 육아에 목적이 없어야 하며,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육아가 놀이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육아의 목적을 없앤다. 육아는 아기를 돌보는 것이다. 아기 돌봄의 목적이 없다. 아기를 잘 돌보는 행동만이 있다. 육아 행위를 하는 유일한 동기는 육아 그 자체에 있다. 울면 달래주고, 배고프면 먹이고, 싸면 치워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면 너무 기계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이란 ‘나’와 ‘너’를 위한 목적이다. 육아를 함으로써 내가 좋은 엄마, 아빠가 되려는 목적이나, 훌륭한 아이로 키우려는 목적이다. 목적이 생기면 욕망이 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노는데 이기려고 악을 쓰고 덤벼서 놀이 분위기 망치는 꼴이다.


 우리는 육아를 하면서 엄마, 아빠의 희생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부모의 사랑은 곧 희생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희생의 가장 큰 오류는 ‘나’라는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타인의 목적을 위해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제물 같다. 육아가 아이를 위한 희생이 되면, 나는 사라지고 아이만 남는다.

 비슷한 의미지만 ‘헌신’은 다르다. 헌신에는 ‘나’라는 중심이 있다. 헌신은 자발성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부분에서 ‘헌신’을 말한다.      


성실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 한다.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 복속시킵니다.

여기에는 ‘내’가 있고, 여기에는 ‘그’가 있고,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가 있는 겁니다. 가령 내가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헌신하는 관계 속에서는 ‘나’와 ‘너’의 목적이 없다. 오로지 ‘우리’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육아에도 아이와 나의 목적이 없어야 하나 보다. 우리 아기를 이렇게 키워야지 하는 목적, 아기를 잘 키워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 목적, SNS에 예쁜 걸 보여주려는 목적 등.(이러한 목적은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으나 자칫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 아기는 아기일 뿐이고, 나는 나일뿐이고, 나는 성실하게 우리 아기를 돌보기를 수행하는 것뿐이다. 아기가 아프지 않게, 배고프지 않게, 울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이런 나의 헌신에 대한 답으로 어쩌다 아기가 웃어준다면 더 행복한 성취감을 얻을 것이다.     

육아에 목적을 없애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떠한 욕망을 없애는 것!


것이 육아가 놀이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인 듯하다.

  

두 번째 단계는 일정한 규칙인데, 이건 다음에 다뤄보도록 하자.  



   

(육아의 목적을 없앤다... 쉽지 않은데... 다음 주에 얘기해 보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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