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처음에는 배가 고파 잘 받아먹는다. 점점 아기는 심심하다. 손에 무언가를 잡고 싶다. 엄마가 주는 이유식 수저를 잡는다. 아기 손에 이유식이 묻기 시작한다. 아기가 신이 나 식탁을 손으로 탁탁 내리친다. 식탁이 이유식으로 범벅이 된다. 엄마가 멈칫하는 사이 아기가 이유식 그릇에 손을 넣는다. 한 줌 잡아 허공에서 흔든다. 열심히 만든 엄마의 이유식이 공중에서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그 가루는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에 흩뿌려진다. 바닥, 매트, 벽, 장난감에 스며든다. 그리고 아기는 그 손으로 자기 얼굴을 비빈다. 아기 입에서 이유식이 새어 나와 턱받이를 거쳐 아기 옷에 뚝뚝 떨어진다.
아기를 키우다가 이유식을 먹이는 동안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기에게 묻는 게 너무너무 싫어 철저하게 준비하여 먹이는 부모도 본 적이 있다. 이유식을 먹이는 동안 아기가 뻗대거나 손으로 장난치면서 이유식이 여기저기 묻는 걸 절대 용납 못 하는 부모들도 보았다. 반면 아기가 어디에 묻히든 말든 아기가 하는 대로 그냥 두는 부모도 있다. 나와 내 아내 같은 경우는 후자 쪽이다. 우리 집 아기는 이유식만 먹고 나면 온몸이 이유식 천지다. 이유식으로 얼굴 팩한 것처럼 범벅이 된다. 옷은 말할 것도 없이 위, 아래 온통 이유식 흐른 자국으로 가득하다. 주변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그렇게 먹여요?”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럼 아내는 “그냥 먹여요”라고 대답한다. 누구는 이유식이 아기 손에만 닿아도 가슴이 확 답답해지고, 벌벌 떨린다고도 한다. 아기가 이유식을 여기저기 묻히면 일일이 다 닦아내고, 아기도 씻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유식 먹이는 것도 힘든데, 아기가 이유식으로 그러면 처리해야 할 일이 더 생기게 된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게 다 힘든 육아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아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데는 앞 챕터에서 말했듯 ‘목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초반에 아기가 잘 안 먹고, 장난치고, 옷, 식탁, 의자에 이유식을 묻혔을 때는 ‘이걸 엄하게 얘기해서 바로 잡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 아내가 <아, 육아란 원래 이런 거구나!(마이클렌 다우클레프 저)>라는 책에서 본 걸 이야기해 줬다.
“어느 지역의 어떤 민족은 아기들에게 화내고 불평하는 어른들을 보면 막 비웃는데, 쟤는 아직 이성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랑 싸운다고.”
그러게 아직 자기 몸도 완벽히 인지가 안 되는 아기에게 화를 내다니.
(이 부분에서 반론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굳이 디펜스 하지 않겠습니다.)
아기가 왜 이렇게 잘 안 먹고 손으로 잡으려 할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 아기는 이유식 먹는 시간이 지루했다. 엄마, 아빠랑 놀고 싶고, 엄마, 아빠처럼 자기가 잡아서 자기 입으로 넣고 싶은 거 같았다. 그래서 잘 안 먹을 때는 손에 장난감도 줘 보고, 내가 아기 앞에서 온갖 웃긴 표정을 지어가며 아기 기분을 좋게 만들고, 아기가 직접 잡고 먹을 수 있는 뻥튀기 과자를 조금씩 주었다. 그럴 때면 아기가 징징거리는 걸 멈추었다. 스스로 잡고 먹는 걸 제일 좋아하는 듯했다. 그래서 자기가 이유식을 손으로 잡고 만져보다가, 입에도 넣었다가, 입에 있는 걸 푸푸 하고 뱉기도 하면서 논다. 그러다 보면 주변은 이유식으로 넘쳐난다.
아내는 아기가 이유식을 여기저기에 묻히는 걸로 스트레스를 받긴 받았다가 어느 날 자기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아기가 이유식을 흩뿌려 놓으니 허탈하고, 헛웃음이 나왔다고 그랬다. 그 순간“그래, 놀아라!”라고 마음먹고, 그냥 아기에게 이유식 그릇을 주었다. 아기는 신나서 놀고, 아내도 모든 걸 내려놓고 같이 웃으면서 이유식을 먹였다. 이 순간 아기의 이유식 먹는 시간은 엄마와 아기의 놀이가 되었다.
첫째로, 이유식을 잘 먹어야 된다는 목적이 사라졌다. ‘아기와 같이하는 이유식 시간’이라는 것만 남았다.
둘째로, 규칙이 사라졌다. 요한 호이징아는 놀이의 조건이 목적 없는 행동과 일정한 규칙이라고 했다.
그런데 규칙이 없는데 어떻게 놀이가 되는 건가? ‘아기와 같이하는 이유식 시간’의 규칙은 일상의 규칙을 무시하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즉, 무(無) 규칙이 규칙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이나 상상을 해봅시다.
‘기분 좋게 산책하는 도중에 비가 내린다.’
어느 맑은 여름날, 옷을 잘 차려입고 교외로 바람 쐬러 나갔다. 큰 공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데 구름이 끼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이 없다. 나무 밑에 잠시 들어가 비를 피해 본다. 아직 가야 할 길은 한참 남았는데 비는 그치지 않는다. 빗방울에 옷이 젖기 시작한다. 안 되겠다 생각하고 길을 나선다. 갑자기 비가 퍼붓듯이 오기 시작한다. 옷과 신발, 얼굴과 머리는 점점 젖어간다. 본인이 생각했던 나들이와 달라지기 시작한다. 짜증이 난다. 비는 거세게 내리고, 온몸이 젖는다. 그냥 마구 젖는다. 비를 피해 봤자 소용이 없다. 비 맞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허탈하다. 헛웃음이 난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비를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닥에 고인 물을 신발로 탁탁 튀겨본다. 물 위에서 뛰어도 본다. 고개를 들고 얼굴로 비를 맞는다. 타닥타닥.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하나하나 느껴본다. “야호!” 소리를 지른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비 맞는 걸 즐긴다. 자유롭다. 자유롭게 놀 수 있다.
이유식을 먹이다가, 비를 맞다가 허탈하지만 헛웃음이 나오는 그 순간은 무엇인가?
왜 그때부터 난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가?
왜 그때부터 난 재미있게 놀 수 있었는가?
일상의 규칙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습득해 온 일반적인 규칙과 관습들이 우리를 얽매고 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들고, ‘사회적인 나’를 형성한다. 이런 사회적인 규칙들이 무너지는 순간 그 안에 있던 ‘본질적인 나’가 드러난다.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나이다.
무규칙이라는 놀이의 규칙이 내 안에 숨어있던 자유로운 영혼을 해방한다. 자유로운 영혼은 앞으로의 목적이 없다. 그 순간 존재하고 살아있다.
육아가 놀이가 되려면,
아기와 같이 있는 시간 동안 엄마, 아빠가 설정한 규칙들을 잠시 내려놓는다.
아무 목적 없이 아기와 같이 있는 것에 집중하고, 마음을 내려놓는다.
어차피 그렇게 할 거니까.
아기를 하나 키워보고 내가 키운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살면서 일반적으로 겪을 수 있는 힘든 육아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는 사람을 발견해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는 말한다.
육아를 하다 보면 아기가 내 밑바닥까지 드러내게 한다고.
어차피 드러날 나의 본질이라면, 어두운 쪽보다는 밝은 쪽으로 드러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