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없는 질문의 자리
아침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아이는 갑자기 말했다.
“이번 주에 꽃순이를 봤어요.
이렇게 마스크 하고 있어.”
꽃순이.
나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언제 봤어?”
“저번에.”
저번이라는 말은
아이에게 늘 가장 안전한 시간이다.
어제일 수도 있고, 몇 년 전일 수도 있다.
“꽃순이는 사람이야, 동물이야?”
“근데 태권도 체육 선생님은 꽃순이라고 부르는데.”
꽃순이는
사람이었고,
태권도 선생님이었고,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기억은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지 못한 채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나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의 말이 거기서 멈춰 있었기 때문에,
엄마인 내게 멈추는 선택지는 없었다.
“태권도 선생님을 만난 거야?”
“응.”
“태권도 차에서?”
“응.”
“유치원 다닐 때 태권도 승하차 도와주시던 선생님 말하는 거야?”
“응”
“최근에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난 거야, 아니면 유치원 다닐 때 만났던 게 생각난 거야?”
“유치원 다닐 때가 생각난 것 같은데.”
아이는 틀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섞여 있었을 뿐이었다.
지적장애 아동의 자발화를 표집 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시간 개념의 혼란’,
‘기억 인출의 비조직성’.
하지만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나는
그걸 그렇게 부를 수 없었다.
아이의 기억은
정리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틀렸다고 말하지 않고
기억을 이어 붙이는 역할을 맡는다.
이번 주와 저번을 구분해 주고,
태권도 선생님과 꽃순이를 연결해 주고,
유치원 시절과 오늘 아침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그 작업은
언어치료 과제이기 전에
엄마의 일이었다.
과제에서는
이런 자발화를 백 개 모으라고 했지만,
집에서는 이런 대화가 매일 수십 번씩 오간다.
기록되는 건
겨우 백 개지만,
기록되지 못한 기억들은
그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아이의 말이 느린 이유는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많기 때문이라는 걸.
흩어진 기억 사이를
하나하나 건너오느라
말이 늦어졌을 뿐이라는 걸.
오늘도 나는
아이의 말을 대신 살아내는 사람으로
식탁 앞에 앉아 있다.
아이와 나란히 그 시간을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