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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원 Feb 21. 2021

경원에게


 경원에게.


 김 경원. 나야. 지금은 2020년 3월 20일 오후 5시 30분, 멜버른에 있는 백 패커스 식당에 앉아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이곳의 분위기는 점점 스산해지고 있어.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변했다고 고백하면 넌 많이 속상해하겠지. 그런데도 나는 한국행 비행기표를 살까 말까 고민 중이야. 아직 결단을 내릴 용기가 없어. 용기란 무엇일까? 전염병이 끓는 상황에서 타국에서 버티는 걸까 아니면 내가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썼던 돈과 노력을 버리고 도망치는 걸까. 3일 내내 고민해봤는데도 용기의 중용이 무엇인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윤리학을 전공해봤자 알 수 있는 게 없네. 하지만 이런 비상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떠올리는 걸 보니 아직 영혼을 잃지는 않았나 봐. 윤리나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서늘하게 살아있는 영혼을 느끼는 일.


 내 별것 없는 지식과 이런 경험으로 언젠가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단 생각을 자주 해. 네가 나에게 해주는 것만큼 나는 너에게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너한테 항상 투정만 부리는데 너는 단 한 번도 귀찮아한 적 없이 날 다독여왔잖아. 너는 언제까지 날 감당할 수 있을까. 내 마음속에 찐득한 것들을 언제까지 덮어줄 수 있을까 두려워. 이기적인 마음을 고백할게. 그래서 나는 너의 혼란이 궁금해. 인질로 붙잡아 둘 혼란이 필요해. 혼란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조금이라도 싹튼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꼭 나한테 말해줘. 새로운 방식으로 다독여줘.


 내가 널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바로 우리의 꼭 맞잡은 손이야. 시험 기간에 공부하면서 불안해 할 때면 네가 내 손을 잡아줬잖아. 집으로 가는 길목의 계단이 가팔라서 내가 내려가기 무서워할 때도. 같은 반 친구들이 우리더러 사귀냐고 할 정도로 찰싹 붙어 있었는데 우리 사이에는 성애보다 훨씬 대단한 사랑이 있는 거 너도 알지?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꼭 집에 초대해줘. 파자마를 잘 차려입고 맨얼굴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 속에서 소리 없는 광채를 만나보자. 빛줄기 하나로 압축된,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의 광채를 만나보자. 한국에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많이 아쉽지만, 너희 집에 놀러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아주 나쁘진 않은 거 같아. 조금만 기다려 건강하게 귀국할게.


 편지를 쓰는 동안 돌아가는 거로 마음이 많이 기울었네. 내 직관과 용기가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기와 직관에도 정답을 찾으려는 모양을 보니 역시 한국 사람인가 봐. 나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편지를 보낸다. 그곳도 마찬가지겠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란 사람들이 튀김 우동을 먹고 있어. 어서 비행기표를 사러 가야겠어. 안녕! 한국에서 봐!
 

 2020년 3월 20일 호주 멜버른에서 김 채원이.


 나의 사랑하는 친구 김 경원에게.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고자 일어나자마자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한 글자도 삐끗할 수 없어서 연필로 쓴다.


 경원, 이번 해는 너의 새로운 모습을 참 많이 보는 해였어. 우리가 서로 친구가 된 지 벌써 7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나는 너의 절반도 모르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웃기지. 다 알 수 있을 거란 오만 말이야. 이사했다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네가 살고있는 집에도 올해가 되어서야 처음 가보고,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는 모습도 처음 보고, 불안에 떠는 모습도 처음 봤어. 너의 새로운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엔 어쩐지 별이 뜨고 물이 차곤 해. 부디 그 속에서 오랫동안 헤엄쳐 주길.


 너희 집에서 너의 가족과 다 같이 밥 먹은 날, 나는 온기에 화상 입고 말았어. 잡채를 먹고, 명이나물 쌈을 싸 먹으니 온몸으로 너의 배경이 느껴지는 거야. 아주 완벽히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남자친구에 대해선… 순종적인 놈이길 바라.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면 인간은 원래부터 그렇다는  말해주고 싶어. 우리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진동하니까.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불안해하는  불안해하지 . 내가   잡아줄게. 네가 19  그랬던 거처럼. 내가 없을   시를 떠올려봐.


 오늘도 과자가 탔다.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군요. 우리 베티 번 씨.

 - 레몬 과자를 파는 베티 번 씨


 내가 좋아하는 권여선 작가의 ⟪레몬⟫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시야.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저 시만은 또렷해.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지금 당장 속상하고 답답할지라도 지나서 생각하면 별일 아니게 된다는 말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를 보내게 되더라도 레몬 과자가 타버린 것뿐이라고 싱그럽게 넘겨버려.


 그럼 안녕. 아 참, 생일 축하해.


 2020년 10월 8일 너의 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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