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뉴스
김명하 안산대 유아교육과 교수
퇴근 길 일주일에 2-3번 마주치는 동네 아주머니와 아기가 있습니다. 아기를 포대기에 둘러업은 새카맣고 깡마른 중년의 여성과 무더운 7월, 어울리지 않는 묘한 이질감이 말을 걸게 했던 것 같습니다. “아기가 더운데 고생이네요”란 인사치레엔 평범한 답이 돌아오기 마련인데, “삼만원만 줘요. 아기 분유가 없어.”란 예측하지 못한 말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매번의 “삼만원”은 어느 날은 아기가 아파서, 어느 날은 기저귀가 떨어져서, 어느 날은 굶어 젖이 안 나와 그녀와의 인사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있던 돈을 탈탈 털어서, 그 다음에는 있는 돈 중 만원만, 그 다음에는 간혹 어떤 날 몇 천원. 그리고 결국 며칠 전부터는 아주머니와 아기를 피해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이웃이고 싶은 사람과, 그 삼만원과 만원과 몇 천원들이 정말 분유와 기저귀와 아기 병원비가 되었을까를 의심하는 매몰찬 사람 사이에서의 갈등이었겠지요. 그러니까요. 기껏 한 개인의 선량한 척 하는 마음과 매몰차지만 합리적이라고 믿는 의심 사이에서 그날의 아기 분유, 기저귀, 엄마의 젖, 병원비, 그러니까 엄마와 아기의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이 결정됩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현대사회를 위협하는 심각한 요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각종 수치가 범람하고, 사람은 여러 구조와 계획 속 익명의 숫자로 떠밀려 다닙니다. 언어란 그 자체로 선언되고 선언된 언어는 다양한 감각을 만들어 냅니다. ‘위기’, ‘저출산’이란 단어에는 기존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불안이 존재합니다. 단어는 그 자체로 과밀한 불안을 야기하고, 과밀한 불안이 ‘사람’을 삭제합니다.
구조조정, 비정규직과 같은 반쪽짜리 사람들은 그렇게 양산됩니다. ‘사람’이 줄어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줄어 ‘사람’을 조정할 수밖에 없고, 사람의 이야기엔 귀 기울일 여유가 사라집니다. 익숙한 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불안은 뛰어난 통치 수단이어서 그것이 모멸을 초래해도 누구도 반박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정한 권력을 유지하거나 힘을 관철시키기가 좀 더 수월해 집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으면 누가 좋을까. 그러니까 인구가 많아지면 누가 좋을까. 여전히 갓 난 아기의 생존이 이웃의 선의에 달린 세상에서, 여전히 만원이 안 되는 최저시급 8,590원의 세상에서, 여전히 기계에 끼고 깔리고 잘려서 매일 6명의 사람이 죽는 산업재해 사망률 1위 국가에서 인구의 감소는 누구의 위기인 것일까요.
이야기가 커졌습니다. 이가 몽땅 빠져 발음이 새는 중년의 허름한 엄마와 이 세상과 만난 지 7-8개월이나 되었을까 싶은 갓 난 아기가 오늘을 날 수 있는 음식과 분유, 기저귀, 그리고 그들을 위한 최소 진료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겠습니까. 추상적 통계 속의 수치가 아니라, 내 옆에서 숨 쉬고 살아있는 두 사람이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러니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아이를 더 이상 예전만큼 낳지 않는 세상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세상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까.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사기야”라는 마음이 깊어지는 시절, 지갑에서 빼어 주는 그 날 그 날 “삼만원”의 변덕으로는 아기에게 남은 시간이 지나치게 길고 그의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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