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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하 Jan 07. 2023

본래의 천진함, 본래의 선의

경인일보 수요광장


"이제 더는 못 올 것 같아. 걷기가 힘들어." 할머니의 포교당과 수영장 30년지기 친구 다섯은 이제 셋만 남았다. 한 분은 작년 92세로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몇 년 전부터 없는 번호라 뜨며 연락이 끊겼다. 다섯에서 셋이 된 친구들은 두 시간거리 교외로 이사 간 할머니를 만나러 지난 10년간 일 년에 한 번 버스와 택시를 타고 길을 걸었다. 바로 옆 바닷가 동네에서 회도 먹고 수다도 떨며 내년을 기약하기를 열 번 쯤 했겠고 아흔 언저리의 어느 날, 그러니까 이제 지팡이에 의지해 느릿느릿 걸어도 친구에게 닿기 힘들겠다 생각된 어느 날 그런 대화가 오갔다. 제일 먼저 걸음이 불편해진 할머니를 더 이상 보러 오지 못할 친구들은 넷이 똑같이 나눠 내던 음식값을 그날은 할머니를 제외하고 극구 셋이 나누어 냈고, 미안해진 할머니는 식당에서 판매하는 젓갈을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이후로는 서로의 생일이나 연말연초, 전화로 안부를 확인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할머니는 도시로 돌아왔다. 세 명의 친구는 그해 가을, 그러니까 2021년의 가을, 끊겼던 만남을 다시 시작했다. 여전히 버스를 타야 하고 느릿느릿 지팡이를 의지한 걸음이지만 같은 도시에 있다는 연대감은 몸의 고단함에 비할 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할머니보다 한 살 많은 아흔넷 친구와 동갑내기 아흔셋 친구, 그리고 한 살 적은 아흔둘 친구와 오랜만의 해후를 했다. 저절로 더 굽어버린 손가락마디와 달근달근 저절로 움직이는 서로의 입술 근육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조금 덜 늙었던 때처럼 이야기 나누었다. 


상처받고 상처내며 2021년 지났다
상흔과 고통은 매장되며 잊혀졌고
서로 선한 인간이라고 더 빤해졌다


1930년생 할머니는 강원도 회양군에서 태어나 1950년 4월 아들을 낳아 전쟁통의 젖먹이를 데리고 이남으로 피난 왔다. 전쟁 이후, 이방인의 삶은 그 시절 여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일가친척이란 보험 없는 피난민은 가깝게 지내던 이들과의 계를 통해 상도 치르고 자식도 출가시켰다. 그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려 정기적으로 식사도 하고 여행도 하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아니겠냐고, 아흔 먹은 할머니들이 어떻게 이리 오래 만날 수 있냐는 우문에 답했다.

오래 지속된 괴롭힘이었다. 조직은 교묘하고 질겼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더 이상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연민의 마음이었겠지만 위로마저도 쓰렸다. 여기저기 베인 상처가 가시처럼 날카로워져 연민도 우애도 의심했고, 고로 연민도 우애도 없었다. 분노와 절망의 문장을 뱀처럼 뱉어내는데, 단체톡방의 문장 뒤로 눈이 내렸다. 그제서야 베란다 너머의 나무와 하늘, 지나는 고양이가 보였다. 12월24일이었다. 한 해의 끝무렵, 선량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과 새날을 축복하는 날.

박완서 작가는 '모독'에서 티베트 사람들의 느긋하고 근심 없고 충족된 표정으로 잘 웃는 천진함을 수양이나 투쟁으로 얻은 것이 아닌 천성적인 자유로움이라 표현했다. 수양이나 투쟁으로 얻은 것이 아닌 본래의 천진함, 본래의 선의, 본래의 선량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상처받고 상처 내고 또다시 상처받고 상처 내는 동안 잊었다. 그렇게 2021년이 지났다. 참전 병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남북전쟁 이후 '군인들의 마음'이라 불렸다가, 1차 대전 이후 '포탄충격', 2차 대전 이후 '전쟁피로', 한국전쟁 이후 '군사적 효능감 소진', 그리고 베트남전쟁 이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란 용어가 되었단 것을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읽었다. '징계위원회', '소청', '업무배제', '직장 내 괴롭힘'이란 표현 역시 인간적인 요소는 제거됐고 고통은 전문 용어 아래 매장됐다. 더 많은 전문적 용어들 속에서 상처와 고통은 잊혀졌고 우리는 서로 자신이 선한 인간일 거란 한 치의 의심 없이 더 빤한 사람이 됐다.

새해엔 선천적 순수함·착한마음이
남루한 일상·고통 균열 내주길 희망


새해가 됐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직 모른다. 다만 명확한 계획 하나는 정했다. 운전을 할 것. 한 차 안에서 아흔 할머니들이 만나고 맛있는 식당 안에서 그녀들의 수다를 듣다 보면 본래의 천진함, 본래의 선의가 어쩌면 이 남루한 일상과 고통에 균열을 내줄지 모른다는 희망.

/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민교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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