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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대로 쩡 Jun 26. 2018

엄마의 움직임이 우리에게도 예민하게 반응하면 좋겠다.

비바람이 불며 태풍이 휩쓸고 간 밤이 지난 이른 아침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새벽에 전화를 걸고 싶었는데 자고 있을까 못했다며 이른 아침이 되길 기다리셨다는 엄마. 밤새 무슨 일은 없었는지 물으신다. 별일 없었다는 말에 꿈을 꿨는데 너네 집에 커다란 나무가 덮쳐 창문이 깨지는 꿈을 꾸셨단다. 별일 없다며 전화를 끊고 혹시나 싶어 베란다로 나갔다. 엄마의 꿈은 현실이었다. 큰 목련나무가 쓰러져 베란다 창문에 닿을까 말까 위기 상황이었다. 경비실로 전화해서 상황을 알렸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나무는 잘려나갔고 그해 유독 목련꽃이 화창해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며칠 지나 엄마께 말씀드렸더니 희한한 일이라며 그래도 다행이다 하며 전화를 끊으셨다.


몇 년 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병원을 발칵 뒤집었던 나는 30분을 "엄마! 엄마!"하며 소리를 외쳤단다. 간호사가 뺨을 때리고 흔들고, 병원장이 쫒아오고, 남편은 울고... 꽤 요란한 상황에 나는 목청껏 엄마를 부르기만 했다 한다. 가까스로 깨어나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며칠 후 통화한 엄마는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하셨다. 내 얼굴은 안 보이는데 '엄마! 엄마!'하며 목놓아 불러 놀라서 일어나니 꿈이었다고 했다. 별일 없었다 말했지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태아는 정신적, 물리적으로 엄마와 하나인 상태로 10개월을 살아간다. 이렇게 엄마와 태아는 세포를 나눠 쓰다 분리되지만 여전히 서로의 세포는 가진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녀는 자라며 또 다른 세포 분열을 통해 엄마의 세포를 잊고 살지만 엄마는 자녀의 세포를 오롯이 간직한 체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자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작은 아픔에도 본능적으로 예민하게 반응되는 엄마에게 남은 자녀의 세포.


며칠 전 낮, 일주일에 한 번 엄마를 살피러 다녀주는 요양보호사 분 전화가 왔다. 엄마가 집에도 안 계시고 통화가 안되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 묻는다. 덜컥!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다. 전화를 한다. 한참 만에야 가뿐 숨을 내쉬며 전화받는 엄마 목소리를 들고서야 휴~하고 안도한다. 이 더위에 텃밭은 뭣하러 가꾸냐 잔소리를 하며 전화를 끊는다. 엄마가 나눠준 세포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자식일 뿐이라 나는 엄마의 위험을 알 길이 없다. 이제 나약해진 엄마의 움직임이 자식인 우리에게도 예민하게 반응하면 좋겠다 생각하며  오늘도 잊지 않고 엄마께 전화를 한다. 그런 자식에게 엄마는 말씀하신다.


"전화해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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