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한때는 결혼식, 돌잔치 등 부르는 경조사는 모두 다녔다.
봄, 가을 주말은 늘 바빴고 마음을 표현하느라, 선물 사느라 지갑은 가벼워졌다. 언젠가부터 정말 중요하다 생각하는 결혼식이나 돌잔치를 제외하고 참석하지 않는다. 돌잔치는 거의 가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다만 부고 소식은 가려고 노력하고 못 가게 될 경우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마음을 전한다.
철학자 나카시마 요시미치의 『비사교적 사교성』 에서 “의식(장례식, 결혼식)에 가지 않으면 방대한 시간이 남는다. 횡재한 셈이다. 나는 다시금 결심했다. 이제는 무뢰한이라 여겨져도 좋다. 곧 있으면 죽을 테니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 시간을 쓰자!”
누구에게나 시간은 한정적이다. 모든 사람의 시간을 함께 해줄 수는 없다. 친구의 셋째 돌잔치까지 챙길 여력까지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미안하지만) 애초에 셋째 돌잔치 초대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최근 결혼도, 돌잔치도 개인적인 행사라는 분위기에 가까운 가족, 지인만 초대하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 그게 맞다. 지금은 의미 있는 관계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멀어질 수 있는 관계는 자신이 안다. 개인적인 행사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믿음을 주는 관계와 나누는 것이 맞다.
칸트는 “만인에 대한 사교성을 지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을 만나라”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의아해하며 묻는다.
“너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나는 ‘원래’ 모든 사람에게 신경 쓰며 감정을 소비하지 않아. 중요한 사람,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나누는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면 된다.
원래 그런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의 기대가 없다. 상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게 된다. 원래 그런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친구 셋째 돌잔치를 가지 않았다고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몇 사람과 지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돌잔치 초대한 지인과도 잘 지내고 있다. 그는 내가 ‘원래 셋째 돌잔치, 아니 돌잔치를 안 가는 사람’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인간관계의 강약을 조절하는 능력을 발휘해서 의미 있는 관계를 알면 된다. 의미 있는 사람에게 집중해서 마음을 나누는 ‘원래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 모든 사람을 같은 질량으로 정성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