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증.
부부 동반 싱가포르 여행에서 돌아와 빨래가 마르기도 전에 부산 여행을 예약했다. 며칠 후 남편은 부산여행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다른 여행지를 골라와 눈을 반짝였다. 눈빛에 홀려 최저가 항공권을 찾고 호텔 예약까지 완료했다. 모두 처리하고서야 정신이 들었지만 이미 예약한 여행은 떠나기로 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다들 다시 떠나자며 난리다. 즐거웠던 여행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우리 부부만이 아니었다. 여행은 중독이다. 한번 맛 들이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마력에 빠져 짐 싸고 풀기를 반복하게 된다.
어디로 떠날까 고민할 때의 설렘은 연애 초기의 파릇파릇한 살구빛 볼과 같다. 떠난다는 설렘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꼬여가는 업무도 여행을 생각하면 너그럽게 받아들여진다.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를 보면 참을 인자가 저절로 새겨진다. 힘이 난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이 설렘이 가장 행복하다. 왠지 모를 가슴 콩닥거림. 묘한 짜릿함. 그 설렘을 즐기는 것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진다는 것은 오랜 가뭄으로 쳐진 잎과 같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의 시작이다. 여행이야말로 제대로 된 호기심 충족 놀이가 아닐까. 음식과 맥주를 좋아하는 우리는 여행지에서 빼놓지 않고 즐기는 것들이 로컬푸드와 맥주다. 생각지 못하게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기도 하고 돈만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경험이란 돈보다 중요한 법이다. 같은 종류의 맥주도 지역마다 맛이 다르다. 더운 나라의 맥주는 보통 밍밍하다. 더운 나라다 보니 자주 마시게 되는 것을 감안해서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맥주에 대한 호기심은 늘 우리를 자극한다.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아직 젊다는 것이 아닐까. 호기심 해결을 위해서는 활발한 두뇌활동이 함께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지난 부부 동반 여행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양보하고 배려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됐다. 여행이란 현실에서 떠나 자유로운 상태다. 누구나 자유롭게 하고 싶은데로 하길 원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다. 함께 간 여행자와의 호흡을 위해서, 주변 여건에 따라서, 주머니 사정 등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다양한 상황을 마주한 나 자신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함께한 여행자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양보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때 행복하고자 한 여행이 악몽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여행에서는 자의든 타이든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여행의 질을 높일 수 있음을 알기에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부부 동반 여행은 너무나 훌륭했다.
새로운 도시로 떠나 낯선 곳을 여행하고 돌아오면 짜릿한 성취감이 든다. 특히 다른 나라로 떠난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내가 또 해냈구나, 낯선 도시에서 별 탈 없이 돌아와 주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포만감이 밀려온다. 몇 년 전 대학 캠퍼스를 가본 적이 있다. 꽤 넓은 캠퍼스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스므살의 눈에 컸던 그곳이 너무 작아 보여 내가 다닌 학교가 맞나 싶었다. 그만큼 내 눈은 작은 캠퍼스에서 넓은 세상을 보는 눈으로 커졌기 때문이리라. 여행은 더 넓은 눈을 가지게 해 준다. 하나보다는 둘을, 둘보다는 셋을 보는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도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즐거웠던 부부 동반 여행의 후유증에 시달려 며칠을 헤매다 부산을 다녀왔다. 몇 년 만에 다시 간 부산은 여전히 흥미로운 곳이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묘한 매력을 주는 이 도시에서 또다시 힘을 얻고 돌아왔다.
일상은 늘 같은 시간으로 돌아간다.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보내는 일상은 같은 시간이지만 다른 공간을 오간다. 여행이 주는 힘이다.
다음 여행에 대한 설렘을 안고 일상의 페달을 밟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 일상을 보낸다고 생각하면 더없이 즐겁고 행복하다.
자, 또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