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비우는 삶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이대로 쩡 Feb 09. 2019

작은 변화가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해주는 시작

- 비우는 삶 에필로그 -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도시에 살고 있던 작은언니가 택배를 보내왔다. 사진과 같은 분홍 원피스였는데 시골 동네에서 어울리지 않게 화려했다.

<출처 Pinterest>

너무 이뻐서 마음을 빼앗겼는데 등에 달린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 바람에 돌려보내야 했다.  


되돌아보면 어린 시절, 부모님은 바빴고 여유가 없었지만 언니들의 보살핌으로 늘 풍족했다. 용돈이 떨어지면 전화할 언니가 셋이나 있었고 그들은 언제나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언니들 덕분에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닐 때도, 직장 초년생일 때도 늘 부족함이 없었다. 남들에게는 엄청난 풍족함은 아니었을지언정 내게는 넘치는 보살핌과 여유였다.


언니들과 붙어살다 독립하며 내 침대, 내 책상, 내 식탁을 처음으로 가져봤다. 독립의 꿈을 이룰 때도 언니 덕분에 가진 돈보다 여유롭게 자유를 얻었다. 이후 저축한 돈이 늘어가면서 집의 상태도 좋아졌다.


상태가 좋아졌다 하지만, 싱글의 삶은 오랫동안 원룸이나 분리형 원룸 정도였다. 마지막 작은 투룸에서 처음으로 내 집(우리 집)을 가진 게 된 건 결혼 몇 년 후 경기도권의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였다. 어릴 때 살던 시골 동네처럼 산이 있고 공기가 좋아서 선택했다. 얼마 안 된 아파트라 깨끗해서 선택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집이 넓어서였다.


하지만 몇 년을 살면서 쌓여간 짐들을 생각하니 지금도 아찔하다. 가뜩이나 넓은 평수에 서비스 면적도 20%가 넘었다. 3대가 살아도 좁지 않을 만큼 넓은 평수였다. 넓은 집을 비워두지 못하고 방방마다 채워 넣기 시작했다. 싱글 때 쓰던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이고 지고 다니다 넓은 집에 들어가면서는 버릴 생각조차 하지 않아 물건들이 넘쳐났다.


몇 년을 살아보니 넓은 집은 청소하느라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점점 지쳐갔다. 나가는 것 없이 들어오기만 하는 물건들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6인용 식탁의 용도는 무엇이며 넓은 소파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손님 침대라고 마련해둔 방은 1년에 한두 번 사용할 뿐이었다. 겨울이면 추워서 가장 작은 방 하나에서 살았다. 남은 방들은 언제나 휑한 찬바람이 돌았다. 싱크대 서랍마다 가득 찬 그릇. 모으다 모으다 넘쳐나기 시작하는 컵. 책으로 가득 찬 방. 옷으로 가득 찬 방. 넓어서 뛰어다니고, 넓어서 가슴이 뚫리고, 넓어서 마음껏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던 집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결심했다.  

이곳을 떠나자.

벗어나고 싶었다. 집이 넓으니 짐도 많았다. 식탁, 소파, 책상, 손님용 침대, 책 등 최대한 짐을 줄이기 시작했다.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단지, 넓은 집이 부담스러웠고, 가진 것이 무거웠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도 짐은 여전히 넘쳐났다. 절반도 안 되는 집으로 이사하고 짐을 구겨 넣느라 며칠을 애써야 했으니 역시 대단한 짐을 소유하고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되돌아보면 그날부터가 비우는 삶의 시작이었다.


그 집을 떠난 지 벌써 6년이 흘렀다. 여전히 가진 것이 넘쳐나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꼭 필요한 것들인지 두 번 세 번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우는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만의 노하우가 쌓이면 애쓰지 않아도 습관처럼 삶에 녹아드는 날이 오겠지. 그 집을 떠나 몇 년을 워밍업이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덜어내고 비우는 삶을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이미 많은 것들을 비우며 살았지만 여전히 가진 것이 많다.


비운다는 것은 물건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사용하지 않는 쓸데없는 물건들을 비워내듯 나를 둘러싼 불필요한 관계, 감정들도 함께 비워내는 것을 말한다.


비워내는 삶이 주었던 긍정적인 경험과 앞으로 얻어낼 경험들을 공유해보고자 매거진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나의 경험을 공감하고 내게도 노하우를 공유해주는 분들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작은 변화가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해주는 시작임을 되뇌며 꾸준히 비우는 삶을 살아가 봐야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