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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대로 쩡 Feb 17. 2019

힐빌리의 노래

J.D 밴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이야기는 이미 구석기시대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집에 태어나 공부 잘해서 성공했다'는 신화는 이제 쉬이 이뤄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부유층이(예를 들면 유투버, 연예인 등) 될 수 있지만 이 또한 트렌드를 읽는 눈과 귀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트렌드를 읽는다는 것은 다양한 매체, 경험을 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결국 있는 집 자식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이 시대의 흐름이 아닐까.

<힐빌리의 노래>
책에 나오는 힐빌리는 미국 중남부 지역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백인 노동자 계급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곳은 오래전 우리나라 두메산골에서 산을 깎아 농사를 지었다는 화적민 같은 느낌이다. 책의 기본 골격은 미국의 최하 빈민층들이 살고 있는 동네 출신의 J.D 밴스가 할모할보와 함께 성장해온 자신의 이야기다.

저자 J.D 밴스는 할모할보의 서툰 양육과 시대의 흐름이 만든 십 대 엄마에게서 태어난다. 부모도, 자식도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지 못했던 엄마는 남자 친구가 수도 없이 바뀌는 것도 모자라 약물중독자가 되고 만다. 할모할보 세대처럼 자신을 양육함에 서툴렀던 엄마를 둔 저자는 할모할보의 보살핌을 받으며 십 대를 보냈다. 그의 십 대는 희망이 없었으며 엄마가 그랬듯, 힐빌리 아이들이 그랬듯, 공부와 무관하게 적당한 직장을 구하거나 국가의 복지혜택을 받는 선택을 하더라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 다른 할모가 있었기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그들과 또 다른 선택을 한 해병대가 있었다. 둘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하며 삶에 대한 시선이 변화해 힐빌리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 아이비리그 로스쿨을 다니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이전과 완전히 다른 계층으로 방향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거친 환경에서 자라던 저자는 십 대의 마지막 3년을 인생의 기둥과 같은 할모와 함께 살면서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고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는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미국 최상위층의 문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 (물론 온전히 누린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여전히 힐빌리 문화와의 괴리감을 피부로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미국 최하층민이었던 백인이 최상층으로 계층 이동을 한 성공 스토리로 읽힐 수 있다. 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소득 불평등이 주는 계급사회감의 문화적 간극 이야기가 한 백인의 손(글)에 의해 표현되어 있다.


그는 신분상승을 했지만 힐빌리는(혹은 힐빌리와 같은 곳의 사람들이) 여전히 계층의 이동 없이 유지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는 힐빌리와 같은 하층민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하나의 이슈로 내던진다. 저자가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을 진학하면서 자신과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로스쿨을 통해 좀 더 높은 계층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의 '힐빌리'에 대한 통렬한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전히 힐빌리 사람으로 사는  많은 이들이 자신처럼 새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이 겪은 높은 계층의 문화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서며 그들 또한 다른 삶을 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안타까움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다. 나 역시 시골에서 십 대를 보내고 도시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살았다면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문화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층의 이동은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개인이 할 수 없는 문화를 국가가 나서서 분위기를 형성해주는 역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이유에서 저자는 다양한 계층이 여러 문화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겉으로는 클린턴이라고 하고 실제는 트럼프를 찍는 서민층의 심리를 꼬집었다.


책은 어떤 결론이 없다. 나 역시 책을 덮으며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성장기만으로 읽어내기에는 찜찜한 기분, 사회적 이슈에 대한 대안이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내게 <힐빌리의 노래>와의 시간은 현실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계층의 이동, 소득의 불균형이 점점 심해지는 현실 등의 상황들) 한 번쯤 이 시대를 통찰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계층의 불균형은 끊임 없이 지속되며 더 심화되는가? 서로의 문화를 경험할 기회는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인가? 간극을 좁히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 관심, 제도들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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