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인간에게 여행은 숙명이지 않을까. 호모 사피엔스가 이동을 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다른 21세기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미지의 세계가 넘쳐났을지도 모른다.
책은 비자 발급을 몰라 중국 푸등 공항 입국과 동시에 '추방' 당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설마 여행일기인가 싶어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첫 번째 중국 여행 단락이 끝나기도 전에 단순 여행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추방당한 중국 여행을 시작으로 다음 중국 여행까지, 여행들이 주었던 인생의 미묘한 항로 변경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에게 여행은 곧 인생임을 이야기 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행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p. 51
호텔방의 빳빳한 침구가 좋다. 아무리 흩어놓아도 외출 후 돌아오면 기계처럼 정리되어있는 호텔의 낯선 물건이 좋다. 어떤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도 그 자리에서 정돈되어 나를 기다리는 곳. 가장 오래 떠난 여행은 한 달여간의 유럽여행이었다. 작가가 말하는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 그 줄행랑이었다. 인생의 난제들이 괴롭힐 때 나를 둘러싼 공간, 물건, 사람, 심지어 공기조차 숨 막힐 때가 있다. 아무리 애써도 세상의 중심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 때 떠나는 여행은 마치 육체는 살던 곳에 두고 영혼만 탈출한 기분이랄까. 영혼이 돌아가 육체와 합체가 되는 순간 다시 현실이 되는 여행.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p. 65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잦은 전학을 다녔던 작가는 언제 어디서나 '노바디(Nobody)'였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다음 전학이 곧 있을 것을, 자신이 뿌리내릴 수 없는 곳에 있음을 알고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은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었다. 어차피 다음 목적지는 알 수 없고 그것이 어디여도 걱정 없이 현재를 살았을 것이다. 여행자처럼 오롯이 현재를 살 수 있다면 굳이 '여행'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떠나지 못해 안달을 낼까. 작가의 독특한 환경과 직업이 뉴욕에 1년을, 부산에 1년을 살면서 또 다른 여행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 p. 81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과 현실도피의 짜릿함은 역시 걱정꺼리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와 보통의 여행자들의 이유가 다르지 않다. 오직 안전한 여행을 위하여, 많은 것을 보고 즐기기 위하여 현재에 집중하는 시간이 바로 여행이다.
이 책은 단순히 작가의 여행 이야기가 아닌, 여행이 자신에게 준 의미와 철학적인 성찰들이 녹아져 있다. 대단한 여행 경험담도 없다. 아니 대단한 경험담이지만 덤덤하게 일상처럼 느껴지는 그의 여행 이야기는 단순히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위한 책이 아니라 삶의 방식, 철학이 담겨있는 김영하식 자기 계발서 느낌이다. 라떼의 부드러움으로 무장한 에세이지만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의 맛과 풍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