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었다.
더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프린트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자마자, 남편은 단칼에 잘라버렸다.
“안 돼.”
숨 한번 고를 새도 없이 끝나버리는 대화.
마음이 턱 막혔다.
“왜? 아이들 학원비는 아낌없이 써주면서,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왜 말도 꺼내보지도 못하게 해?”
참으려던 감정이 삐죽 튀어나왔다.
씩씩거리며 남편을 노려보게 된다.
남편은 절약에 철저한 사람이다.
늘 ‘있는 걸 최대한 활용하자’는 말을 달고 산다.
가끔은 그런 모습이 든든하다가도, 내가 필요할 때마다 “안 돼”라는 말로 돌아오면 마음이 무너진다.
얼마 전, 자격증 공부를 위해 학원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랬다.
“공부는 문제집만 있으면 돼.”
그리고는 본인의 군 시절,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독학으로 땄던 무용담이 시작된다.
한 번이 아니다. 1절, 2절,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야기.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선 느낌이었다.
나는 주부지만, 배우고 싶은 게 많다.
아이들에게 질투심이 느껴질 정도로, 나도 한 걸음 나아가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왜 필요한지 들어만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 말은 늘 끝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뚝 끊긴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내가 아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프린트기를 검색한다.
20만 원은 무리다. 10만 원대 중고 제품을 찾아보며 링크를 남편에게 카톡으로 보낸다.
그는 여전히 무반응.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냐? 생일도 다가오는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이렇다.
“생일선물은 안 해줄 건데.”
그 말 한마디에 어깨가 툭 떨어진다.
자린고비 같은 남편과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익숙하다.
그래도 이번엔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앱을 켠다.
당근마켓에서 알람을 설정해 본다.
5만 원대, 10만 원 이하의 프린트기.
혹시 괜찮은 매물이 뜨면 설득해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또 희망을 건다.
“중학교 올라가면 프린트 꼭 필요해. 친구들 다 있대.”
“전에 있던 거 쓰면 되잖아.”
“와이파이도 안 되고, 잉크값도 더 들어.”
계속 말해보지만, 그는 나무처럼 꿈쩍도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급히 프린트할 일이 생겼다.
이번엔 다를까? 싶었지만, 역시 그는 프린트 카페로 향했다.
내가 느끼는 불편과 시간 낭비를 줄줄이 설명했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물론, 몰래 사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어떤 물건이든 서로 허락을 구하는 습관이 있다.
그 신뢰를 깨고 싶진 않다.
프린트기를 사고 싶은 진짜 이유—
사실 남편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말하려니,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잘 쓰고 싶다.
모니터 화면만으로는 부족하다.
글을 인쇄해 종이로 보며 고치고, 다시 출력하고 싶은 마음.
글쓰기 실력을 키우고 싶은 마음.
그 출발점이 프린트기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2025년, 나는 작지만 단단한 다짐을 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쓰고, 조금씩 나아지고 싶었다.
남들 눈에는 보잘것없는 시작일지 몰라도,
내겐 이 프린트기 하나가 진짜 간절하다.
명품 가방보다도, 새 옷보다도.
프린트기 하나가, 나를 ‘나답게’ 살게 해줄 것 같다.
오늘도 알람을 확인하며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이번엔, 꼭 설득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