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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Aug 30. 2021

잔혹동화의 도래

헨젤과 그레텔은 가난한 나무꾼의 아이들이었다. 계모의 종용으로 친아버지는 아이들을 산속 깊은 곳에 버렸고, 아이들은 죽음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다. 어두운 밤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남매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살기 위해, 죽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티는 동화 속 장면을 보며, 나를 버리지 않았던 부모님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과자 집’을 행복하게 상상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마녀가 동시에 떠올라 몸서리를 쳤었다. 그리고 아이를 잡아먹는 마녀보다 그걸 알면서 산속에 버리라 했던 계모가 더 무섭고 미웠으며 겨우 살아 돌아온 집에서 다시 산속에 버릴 계획을 듣는 헨젤의 두려움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지금도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장례식에서 빨간 구두를 신었던 아이의 발목이 잘리고, 탐스러운 양배추를 훔치다 걸린 남편이 죄를 무마하기 위해 딸을 내어 주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당시 사람들의 삶이 녹녹지 않아 아이에게 애정을 쏟지 못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화가 일정한 공간 (가정, 혹은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드러나는 이야기라고 볼 때, 이런 동화에서 보여주는 가족들의 관계는 정상적이지 않다.     

요즘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아동학대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오래전 유럽의 잔혹동화랑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우리 고전의 장화, 홍련 전도 해당되려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어린 자녀를 홀로 집에 방치하며 사랑 찾아 나간 엄마나, 목놓아 우는 아이가 귀찮아 폭력을 행사한 아빠, 능력 없고 손가락질받는 부모 밑에서 평생 고생하느니 태어나자마자 죽는 게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 모두 강력한 마법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하루아침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마법 말이다. 이런 마법이 있을까만은 아동학대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개선되지 않고 악화되는 상황이 슬픔과 분노를 만들어낸다.        

  집단의 삐뚤어진 분노가 약자에게 행한 가혹함을 상기시켜본다면 가정 내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행한 것도 이와 동일선상에 있지 않나 싶다.      

가정 폭력의 문제는 예전부터 끊이지 않고 있어 왔다. 만취한 남편의 상습적 폭행으로 시달린 부인이 남편을 죽인 사건을 두고, 살인이냐 정당방위냐의 논쟁이 이어온 적도 있었고,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가족 상담을 받는 상황은 늘 화해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였다. 어디 그뿐인가. 퍼런 멍이 든 눈두덩이를 달걀로 굴러가며 펑펑 우는 아낙네가 “그 사람이 술을 먹어서 그렇지. 평상시는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라며, 달래주는 이웃사람들에게 말하는 드라마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에 가정폭력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자녀를 얻으면 좋은 엄마, 아빠가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일상에서는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감수해야 할 것들이 다반사이다. 내 마음대로 자라주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개별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해낼 때까지 ‘기다림’의 자세를 가지는 것. 그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몇 번의 마음의 폭풍우를 지나서야 이루어진다. (아니 사실 이루어진다기 보다 그냥 만들어진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아이를 키울 때에만 적용되는 일이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과정이 이러하지 않은가.      

  아동폭력의 문제가 그 가정 내의 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일 수 있겠으나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의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약자에 대한 태도, 개인주의를 넘어선 이기주의, 개별성 인정의 부재, 조급함. 

    

연일 뉴스에서 반인륜적인 행동을 한 부모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고, 새롭고 더 자극적인 아동폭력사건이 등장한다. 뉴스를 접하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나를 때리지 않는 부모님’에게 감사할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잘못하면 ‘나를 버리지 않을까?’하는 두려움과 도움 주지 않는 세상을 잔혹 동화로 여기게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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