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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Aug 23. 2021

40대 인어의 선택

  청나라 서태후는 황제의 산책시간에 맞춰 아름다운 노래로 그를 유혹했다 한다. 그녀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는 황제를 사로잡았고 권력의 최고 자리에 올려주었다.  배우 한석규가 뛰어난 외모는 아니지만 대배우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성우를 할 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왕의 위엄, 사기꾼의 간사함, 교사로서의 신뢰감 등 그가 맡는 역할에 감초 역할을 하며 연기 잘하는 배우로 각인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그뿐인가?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목소리가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오직 목소리로만 사람들을 매료시키며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마력을 보여주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다른 건 몰라도 목소리 하나만은 좋은 유전자를 받아서 기가 막히게 괜찮다는 자부심을 가진 일인으로써 목소리 덕을 많이 보았다. 학창 시절에는 대본 읽기나 시낭송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고, 어쩔 땐 흥까지 겸비한 기질이 더해지면서 노래 또한 곧잘 했었기에 축제 때도 그랬고 노래방에서도 어김없이 엄지 척을 받아내며 어깨가 으쓱한 경험이 충만한 나였다. 얼굴은 그저 그러니 멋진 이성을 만나서 썸 타고 싶으면 꼭 노래방같이 가면 성공률이 높을 거라는 선배들의 말을 들으며 우스개 소리로 받아넘기면서도 한쪽으로는 우쭐함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나에게 목소리는 삶의 활력소이자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 목소리가 변해가고 있다. 몇 년 전 갑자기 소리가 나오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성대에 흠집이 나서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당부한다. 그리고 성대 상태가 매우 안 좋으니 소리가 계속 나지 않으면 대학병원 음성센터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사에게 흔한 직업병이니 대학병원까지는 무슨... 그냥저냥 소리 나오면 되었지... ’   


  교사들의 흔한 직업병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천천히 낫겠지 싶어 마음을 여유롭게 가져 보지만 날이 갈수록 되돌아오지 않는 고운 소리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깊어진다. 나는 유행가를 부르며 힘든 줄 모르고 집안일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큰 소리 한 번 지르며 스트레스 풀고, 학생들에게 엄한 교육을 했지만 나근한 목소리 덕에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막걸리 한 잔 걸친 걸걸한 아재 목소리가 되어 가고 있다.     


   선원들의 마음을 훔쳤던 세이렌.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고 바다 사나이들이 바닷속으로 빠지니 오디세우스도 노랫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꽁꽁 싸맸다고 하니 목소리의 매력은 외모를 뛰어넘는다.

  그런 목소리를 버린 인어 공주. 세이렌 신화의 이야기와 이어서 생각해 본다면 인어 공주에게 목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상상 이상의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랑을 위해 사람의 다리를 택했던 인어공주 동화를 다시 떠올려 보며 하루아침에 벙어리가 되어 낯선 삶을 살게 된 그녀와 내가 겹쳐진다.      


사랑에 흠뻑 빠져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인어공주는, 자신의 매력보다 상대에게 헌신하는 것에서 사랑을 구했다. 어떤 이는 지고지순한 인어공주의 사랑을 보며 감동하거나 사랑의 위대한 힘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인어공주가 세이렌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어둑어둑한 뱃머리 불빛 아래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오히려 왕자가 그녀에게 흠뻑 빠졌을지도, 혹은 왕자가 오히려 마녀에게 자신을 인어로 만들어 달라고 애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목소리... 교사의 직업병...     


조용히 고요하게 돌이켜 보니 나에게 목소리는 그저 교사의 직업병으로 치부하는 것 이상임을 느끼게 된다. 숙명처럼 왕자를 받아들이고 물거품의 삶을 선택한 인어 공주를 뒤로하고 교사의 숙명인 듯 쉰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것 따위는 하지 않을란다. 나의 재능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소소하나마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 아름다운 목소리. 아니 나의 목소리로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어공주야. 나는 목소리를 택하련다. 희생으로 값진 삶을 얻는 것보다,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며 즐거운 삶을 가꾸고 이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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